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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세대의 《잡담》 : 방어적 개인주의를 넘어
    writings 2019. 10. 24. 01:04

    * 2019년 10월 출간된 《잡담》 2주년 단행본 서론으로 쓴 글입니다. 
    * 계간 건축비평지 《잡담》 관련 사항 : tumblbug.com/archat8 참조

     

    Z세대의 잡담 - 방어적 개인주의를 넘어

     

    창간 2주년을 맞아, 잡담에 관한 사실들을 나열해본다. 잡담2017년 가을에 창간했다. 잡담을 창간한 네 명의 대학생은 모두 1994년에 태어났다. 이번 단행본의 편집진은 총 17명으로, 가장 어리게는 1999년생이 포함됐다. 잡담에는 학부생 혹은 만 29세 이하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고정편집진으로 지원할 수 있다. 그들이 만드는 잡담재미있지만 깊이 있고 주변적이지만 여과 없는 목소리로, 건축과 건축을 둘러싼 것들에 진보적인 영향을 끼치려는목적을 가진다. 간추리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잡담>은 시각세계에 영향을 끼치려는 90년대 중후반생의 집단이며, 곧 시각세계에 영향을 끼치려는 00년대 초반생의 집단이 될 것이다.’ 다시 간추리자면, ‘잡담은 밀레니얼-Z세대의 비평이다.’

     

    한 세대의 비평은, 그의 세대를 호명할 의무를 갖는다. 기디온(S. Gideon)이 국제주의를, 밴험(R. Banham)이 뉴 브루털리즘을, 젠크스(C. Jencks)가 성기 포스트 모던을, 프램튼(K. Frampton)이 비판적 지역주의를, 헤이스(M. Hays)가 레이트 아방가르드를, 퀸터(S. Kwinter)가 초기 디지털을, 흐름을 꿰뚫어 본 이론가들이 시대를 호명하고 실천의 우주에 포집의 그물을 쳤기에, 건축은 매 순간 스스로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 되었으며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다. 실천과 학문을 양손에 쥐고, 통찰로 세대를 호명해 건축()를 묶어내는 이론/비평가가 없다면, 역사는 역사화되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의 나침반을 내재화하지 못한다면, 건축은 인간 진보의 도구로 쓰일 수 없다.

     

    그러므로, 건축비평지 잡담은 넓게는 밀레니얼 세대, 좁게는 Z세대의 건축과 시각성을 통찰할 의무를 갖는다. Z세대의 건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세대를 관통하는 감성을 정의하고, 감성의 근원이 되는 시대정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건축의 책을 열며, 나는 건축을 둘러싼 것들을 논해본다.

     

    주지하듯,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로 폴 크루그먼(P. Krugman)이 예지한 기대감소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저성장 수축사회로의 전환을 뜻했다. 공급과잉과 양극화로 미래에 대한 전반적인 희망이 꺾인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예술의 기본적 전제였던, 내일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도 구조적으로 좌절되었다. 물론 역사는 늘 사회경제적 한계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전과 달리 불만의 에너지는 거세되었고, 좌절과 무기력감만이 도처에 깔렸다. 각자는 각자의 성을 쌓고 안에 숨어,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인간사회 진보의 기본조건인, 대화를 통해 차이를 극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상대방의 인정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인정은 나 혼자 하면 된다(“ㅇㅈ?ㅇㅇㅈ”). 반박은 허용하지 않는다(“ㅂㅂㅂㄱ”). 나만 확신하면 된다(“ㅇㄱㄹㅇ”). 칭하건대, ‘방어적 개인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방어적 개인주의의 시대에, 서로 다른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물리적으로야 집단이 있다. 그러나 집단 내에서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성 밖에 나와 대화를 통해 확장적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대신, 성 안에서 매 순간 다른 개인으로만 존재하기 위해 그룹을 쪼갠다. <고파스>에서 지방대를 무시하는 나는 엘리트 고려대생이다. 고려대생은 물리적으로는 집단이지만, 그 순간에 고려대생 개인들의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방대와 구분되는 고려대생이라는 거대한 개인만이 존재한다. <고파스>에서 나가 뉴스에 접속할 때, 난민을 손가락질하는 나는 순수한 한국인이다. 역시, 여기의 한국인은 난민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내국인일 뿐, 한국인 개인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매 순간 택해지는 집단정체성은 완벽하게 균일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하게 성 밖으로 나가서 타인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계속 개인인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 거대한 개인(균일한 집단정체성)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면? 2015년 이후 트위터 중심의 넷페미니즘이 어떻게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분열해왔는지를 복기해보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방어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개별적 정체성을 공동체 내에서 화합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경쟁을 도모하는 과거의 이상적 개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매 순간 다른 거대개인을 취사선택함으로써 편리한 삶이 굴러가므로, ‘진짜개인을 마주칠 일은 사실상 없다. 진짜 개인들은 숨고 거대개인들이 대리격투를 벌인다. 지역균형제도가 쟁점이 되면 엘리트 고려대생이라는 거대개인과 차별받는 지방대생이라는 거대개인이 부딪힌다. 유리천장이 쟁점이 되면 역차별받는 남성이라는 거대개인과 페미니스트라는 거대개인이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의 부딪힘은 차이의 해소를 위한 대화가 아니다. 차이가 해소되면, 거대개인을 지탱하는 정체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도태된 지방대생이 없는 엘리트 SKY이 존재할 수 있는가? “쿵쾅대는 메갈들이 없는 역차별당하는 남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즉 명확히 구분되는 거대개인은 서로를 지탱하는 거울쌍이다. 그러므로 부딪힘은, 숨은 진짜 개인의 선택옵션이 될 거대개인 정체성을 지탱하기 위한 폭력의 게임일 뿐, 설득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러니 무작정 비난한 뒤 근거를 말해주지 않는다(“모르면 공부하세요”). 내용은 들을 필요도 없고 인간의 말로 쳐주지도 않는다(“빼애액”). 방어/폐쇄가 논리를 대체한다. 혐오와 폭력이 수위를 높여간다. 인간의 본성이 공격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그게 이 시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성 안에 있는 게 서로 편하고 성 안에 각자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며, 타인과의 마주침 없이 살기 위해서는 거울쌍을 이루는 거대개인 정체성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어적 개인주의의 감성은 무엇인가? 성 안으로 숨은 진짜 개인은 무얼 하나? 혼자 놀 뿐이다. 차이의 선을 넘어설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판이 완성되어 있으므로, 모든 컨텐츠도 주장과 설득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내러티브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미지가 차지한다. 시대의 감성을 여과 없이 투영하는 팝 시장을 보면 가장 명확하다. 2019년 오늘 10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음악은 아마도 힙합일텐데, 실상 오늘의 힙합은 과거의 힙합과는 전혀 달라졌다. 과거의 주목받는 래퍼들에게는 가사의 내용이 중요했다. 타이거JK, 타블로, 피타입, 버벌진트 등은 모두 개별 곡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중요시했고, 읽으며 풀이해야 하는 많은 레퍼런스를 숨겨놓곤 했다. 타이거JK의 대표곡 제목은 대단히 선언적인 <소외된 모두, 왼발을 모두 앞으로!>이며, 타이거JK를 언급한 타블로의 가사 <Believe>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Like Bob Dylan ‘I'm Not There’ / in this 폐허 레어 성서 in your eyePod 플레이어 / Till I see God up there / 높이 솟아올라 / 세상은 유대자본이 지속한 / 몰락 속에 피로 차올라 / But 징조가 좋다 / To the free mountaintop / 루터 킹 목사 좇아그야말로 문자와 기호의 힙합이었고, 내러티브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의 힙합은 밈(meme)과 컨셉으로 작동한다. 올해 고등래퍼3방영 당시 인기를 끌며 SNS상에 수많은 비디오들과 패러디를 양산했던 양승호의 경우를 보자. 센세이셔널했던 그의 첫 무대에서 가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 ‘’, ‘와 같은 추임새이며, 냉정하게 말해 문장으로 이루어진 나머지 부분들도 리듬을 만드는 음성적인 수단일 뿐 무슨 메시지인지는 알기도 힘들고 알려줄 의사도 없어 보인다. 대신 몰아치다 끊어지는 리듬과 그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몸짓, 과장된 표정, 수경과 헬리콥터 모자 같은 소품들이 한 데 모여 캐릭터를 형성한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일제히 고평가를 내린다. 오늘의 힙합은 무엇을 주장하는지 문장을 끝까지 들을 필요 없이, 한 순간에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한 심사위원은 그의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곧장 와 스키 마스크(Ski Mask)같아라는 말로 호감을 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스키 마스크 더 슬럼프 갓(Ski Mask The Slump God)은 미국의 래퍼로, 'fucked up'‘ah’ 같은 의미가 없는 추임새가 계속되는 곡으로 큰 인기를 끈 또 다른 컨셉 스타다. 즉 인터넷에서 밈이 되어 유통될 수 있는 캐릭터, 래퍼의 이미지가 문자적인 내용보다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실제로 양승호의 인기도 그의 몸짓이나 소품에 대한 비주얼적인 패러디가 주를 이뤘고, 가사의 내용을 언급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이미지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장, 근거, 설득, 궁극적으로 오고가는 대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이미지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성 안의 방어적인 개인들은 애쓰지 않는다. 뭘 누구한테 납득시키고 싶지도 않고, 나와 다른 세상을 알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과거의 래퍼피타입은 2015년에도 여전히 더 이상 광화문엔 달달한 연가 따윈 어울리지 않아 (...) 대극장 돌계단에 앉아 바라본 건 제일 쎈 나라 공관 / 21세기 봉건제 포식자의 공간 (...) 나의 밤관 상관없다 방관한 타인의 삶 / 반강제로 수긍한 이 시스템 / 시스템 위에 시스템이 낳은 시스템 / 권력이 거리에 미메시스된 피라밋 같은 건물들같은 말들을 가사로 내놨지만, 더 이상 어린 힙합 팬들의 뉴스피드를 차지하지 못했고, 아무도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grr kakkak’, ‘shoong’, ‘skrrt skrrt’과 같은, 애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소리로 된 이미지 조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중음악을 살폈지만, 이 감성 원리는 이미 음악을 넘어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근 몇 년 사이 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는 고양이. 특히 Z세대의 이용비중이 페이스북보다 높은 트위터, 인스타그램에서 특히 고양이 컨텐츠의 비중이 높다. 수많은 관련 유행어들(“나만 고양이 없어”, “냥냥펀치”)을 보라. 왜 그럴까?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이 야기하는 피곤함을 주지 않는, ‘그냥귀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달리 차이를 확인하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양이 뿐 아니라 강아지 관련 컨텐츠도 과거에 비해 늘어났으면서도, 일반적으로 사람과 더 소통하려 하는 강아지보다 고양이가 더 큰 인기를 누린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Z세대에 의해 새 전성기를 구가하는 컨텐츠는 반려동물 뿐이 아니다. 뉴스피드의 봄날을 지배하는 것은 벚꽃놀이인데, 이 또한 흩날리는 벚꽃이 주장 없이예쁜, 이미지적으로 간편하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유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애쓰지 않는 감성의 유행은, SNS의 형식적인 측면과도 연동되어 있다. 인스타그램은 몇 초가 지나면 자동으로 넘어가고, 24시간이 지나면 삭제되는 휘발성 업로드(“스토리”)를 개발하여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여기에는 고전적인 카메라의 기능이 아닌, 짧은 영상을 기계적으로 앞뒤 반복하는 기능(“부메랑”)이나 과장되게 줌인을 하는 기능(“슈퍼줌”)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일반 비디오 업로드/재생의 제한적 기능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지는데, 허용되는 비디오의 길이는 길어도 2,3분 내외이다. 또 소리를 끄거나 켜는 기능뿐, 재생 바(bar)가 없어 내용을 이동시킬 수 없다. 결국 기능의 하나하나가 순간적인 인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이미지를 만들고 전달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텍스트는 사진 아래에 기입할 수 있지만, 텍스트만 올리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줄바꿈도 제대로 안 될 정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된다. 따라서 이용자들도 한두 줄짜리 짧은 코멘트와 해쉬태그를 붙이는 게 고작이다. 자연히, 이 순간 가장 인기 있는 Z세대 SNS인 인스타그램은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 조각들이 스쳐지나가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는 사라지는 한 장의 이미지와 짧은 영상을 통해 이뤄낸 스냅챗의 성과나, 그것을 중국에서 이어받은 틱톡의 부흥과도 궤를 같이한다. 영상전문 플랫폼인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긴 내러티브를 전달하기는 어려운, 밈과 이미지로 엮어내는 15분 이내의 짧은 컨텐츠라는 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유튜브 영상제작사 딩고가 가장 집중적으로 내놓는 컨텐츠가 바로 래퍼들을 데리고 각종 밈과 짤을 쏟아내는 <딩고 프리스타일>이 아니던가. , 영화를 스트리밍하는 넷플릭스마저, 20분이 되지 않는 오리지널 컨텐츠들을 공격적으로 내놓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이르면, 주장하지 않고 애쓰지 않는 시대 감성, 칭컨대 칠 컬쳐(chill culture)’가 얼마나 내용적, 형식적으로 Z세대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각자의 성 안에서 우리는 타자 없이 취한다. 웃기든, 귀엽든, 릴랙스하든, ‘은 애쓰지 않는다. 소위 핫(hot) 컨텐츠, 즉 꽉 짜인 내러티브와 빽빽한 기호들로 이루어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컨텐츠들과는 거리가 멀다.

     

    Z세대의 시대정신(방어적 개인주의)과 감성(칠 컬쳐)을 파악하고자 문밖의 세상을 둘러보았으나, 건축 안에서도 원리는 지배적이다. 오늘의 건축시장은 대규모 복합프로그램을 짓는 대형 사무소와, 내부공간 위주의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는 독립 건축가의 양 극단으로 분화하고 있다. 소위 자본소득 성장이 노동소득 성장보다 커서, 불평등 또한 199가 아닌 0.199.9, 0.0199.99의 구도로 극단화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몰락한 사회는 예술의 진보적 기능을 잃은 사회다. 물론 칸예 웨스트(K. West)의 아파트를 디자인할 건축가는 늘 필요할 거다. 그러나 그 0.01퍼센트의 니즈를 충족하는 극소수의 건축가들을 제외하면, 나머지에게 남은 옵션은 초거대자본이 거대자본을 굴리는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거나, 카페나 술집과 같은 단일 프로그램을 예쁘게 꾸미는 일 정도만 남게 된다. 사회경제적 한계는 걷힐 생각이 없어 보이므로, 이런 경향은 당분간 심화할 것이다. 그 양갈래 길이 자체로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독립 엘리트 건축가가 규모를 아우르는 작업을 꾸준히 내놓으며, (현실의 유저가 누가 됐든) 가상의 향유자로 상정된 범 대중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쳐, 건축적 이상을 실천한다, 건축예술의 꿈은 더이상 실천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자기 이름을 걸고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실천할 듯 가르치는 건축학인증 5년제 교육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는 우리 모두 보라고 지어졌지만, 클라우디오 실베스트린(Claudio Silvestrin)의 로프트는 한 명만 보라고 지어진 게 아닌가.

     

    즉 계급으로 고착화한 소득불평등은, 건축에도 예외 없이 내일이 나아질 수 없다는 기대감소의 마인드셋을 본격화했다. 엘리트 건축가들이 건축적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업역이 좁아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독립 건축가들이 적정 규모의 공공건축에 눈을 돌리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나, 우리가 2018년 겨울호에서 지적한 대로, 그마저도 제도와 관행, 때로 불공정성 앞에 틈을 드러내고 있다. 고전적인 아키텍트가 될 길은 어느 때보다 요원하다. 그럴 기회를 주고 결과물을 소비/향유하며 선순환을 유지시킬 계층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을 들여 읽어내야 하는 메세지를 전달 할 수 있는 건축을 지을-, 또 그렇게 지어진 메세지를 읽을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잉여자원을 가진-, 아름다운 부르주아 중산층 고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99.99의 계급에 속하는 우리는, 애써서 읽어야 하는 건축을 원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Z세대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축은, 오직 타자와의 부딪힘 없이 편안하게, 표층적으로 할 수 있는 건축이다. 자취방을 전전하는 우리는 앞으로도 빌라 어쩌고를 살 일이 없다. 내가 사는 곳이 좁고 불편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듯한 상황에서, 단독주택을 지어놓고 ‘(건축가가 의도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생활자의 의지다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말은 우스워진다. 덜그럭거리는 남루한 생활공간, 그마저도 내 것이 아닌 생활공간에 사니, 집을 떠나는 게 외려 편안함을 찾으러 가는 길이 된다. 그러니 Z세대에게 유행하는 여행이 호캉스. 서울 시내에 업스케일 호텔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더 허락된다면 제주도, 혹은 일본에서 짧은 바캉스를 즐긴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히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은 갈수록 Z세대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50050짜리 방이 제공하지 못하는 완벽히 닫힌 공간, 룸서비스를 제외하곤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곳으로 간다. 나는 창밖을 보더라도,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는 곳으로. 타자의 존재가 없는 곳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산이든 바다든 풍경을 풍경화처럼 보며 한숨이나 쉴 수 있는 이미지화된 곳으로.

     

    이런 흐름은 건축의 스타일에도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80년대생들은 20~29세에 2008년의 경제위기를 겪었고, 시대적 변화가 본격화한 시기에 건축교육을 받거나 사회에 진출했다. 따라서 밀레니얼 세대인 그들이 2010년대에 들어 독립사무소를 개소했을 때, 그들의 디자인에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 영향은 이미 가시화됐다. 80년대생 건축가들의 작품에서는 내러티브로 읽고 메시지로 해석해야 하는 고전적인 건축 속성에 대한 추구가 사라지고 있다. 건축 디자인의 칠 컬쳐인 셈인데, 첫 단계는 사회경제적 한계 뒤 남은 한 줌의 자율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건축을 배움과 동시에 기대감소를 내면화한 그들은 건축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는 사회경제적 한계에 감정적 반응을 표출하는 디자인을 시도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닫는다. 정치, 사회, 경제의 문제를 분리시키고, 스스로가 목표를 설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폐쇄적인 게임의 규칙을 창조한다. 부딪힘과 설득을 포기한 채, 홀로 응용하며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규칙에는 시공 디테일과 표면적 재료성이 있다. 살펴보라. 이전 세대의 좋은 건축가들도 물론 시공상의 디테일을 잘 컨트롤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늘의 세대에게 시공 디테일에 대한 관심은 종종 오락적인 집착의 형태로 발전하곤 한다. 재료성도 마찬가지다. 과거 건축의 재료성은 몸의 현상학적 경험과 맞닿아 있거나, 구축성과 연관지어 재료의 정직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식으로 다뤄지곤 했다. 그러나 80년대생 건축가들은 그와 같은 담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뵌다. 그들은 건축 개념상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적이거나 실험적인 이유로 재료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이는 철저히 표면상의 문제로 남는다.

     

    우리 세대의 건축가들이 새롭게 시도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조차 칠 컬쳐의 형식 그 자체에 부합하는 극도로 이미지화된 장난이다. 먼저 절대주의를 연상시키는 음전한 기하학적 조형성의 추구가 그렇다.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은 건축가의 의지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함께,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쾌적성을 라인으로 설정하고, 그 라인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기하학적인 장난들을 구사한다. 자연히, 조형성은 주로 기본도형에 가까운 단순한 형태가 깔끔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추구된다. , 과거 스타일의 이미지적인 조각들이 무작위로 소환되기도 한다. 이는 예전의 인용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스타일은 언제나 분해되어 의도된 맛을 위해 선택되고 조리되었다. 그와 달리 오늘에 이르러 과거의 스타일은 좀비가 입어보는 거죽처럼 순서 없이 되살아난다. 과거의 납작한 껍데기는 다시 인스타그램의 정방형 화면에 실릴 수 있는 한 조각의 장면이 되어, 공간경영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건축을 둘러싼 것들을 다시 둘러보면, 이와 같은 건축의 칠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201612월부터 20171월까지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렸던 젊은 추상화가들의 단체전 RULES를 보자. 기획자에 따르면 전시의 제목은 참여 작가 모두가 자신이 온전히 통치(rules)’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rules)을 고수해 나가고 있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즉 일반적인 규칙이 사회구성원이 사이에서 통용되기 위해 만들어진다면, 젊은 화가들의 규칙, 본인이 만들어낸 화폭 안의 세계에서만 지켜진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적인 규칙과 다름없이 자못 객관적이고 명확해 보이지만, 그 가치는 본인이 만들고 플레이하는 가상의 게임을 작동시키는 데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그들의 작업에서는 사회경제적 메시지를 찾을 수 없고, 작품은 바깥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기획자는 그 사회적인 이유 또한 유추한다. 현실의 삶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작은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곳에서 온전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우리 세대 건축가들의 성 안 건축에 대한 묘사와 전혀 다르지 않다. Z세대 플레이어들이 건축보다 일찍 주목을 받는 미술계에선 아예 전시를 통해 진단서를 떼는 수준이 되었을 뿐이다. 방어적 개인주의의 시대 우리의 건축은, 여느 시각세계, 여느 문화세계와 다름없이, ‘에 점령당한 것이다.

     

    상황이 명확해진 이 지점에서 잡담의 이유를 복기해보자. 잡담은 밀레니얼-Z세대의 비평이며, 그래서 밀레니얼-Z세대의 건축을 호명할 의무를 갖는다. 잡담, 건축과 건축을 둘러싼 것들에 진보적인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 그러므로 잡담이 가진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방어적 개인주의의 퇴행을 돌파해나갈 우리 세대의 진보적인 건축을 유도하고, 묶어내어, 오늘의 역사를 끌고 가는 일에 있게 된다. 잡담은 이어지고 사람은 들고 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 하나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

     

    잡담 2주년을 맞아, 편집장 곽승찬

     

     

     

    (*후반부 논의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글 2010년대 독립 건축가들의 디자인 특성에 관한 연구 1980년대생 건축가들을 중심으로(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39 No.1)좀비-천사의 시대: 문화세계의 향수중독과 건축의 대응(잡담2018년 가을호)에서 직간접 인용했음을 밝힌다. 특히, 건축 디자인의 칠 컬쳐 경향에 관한 예시 등 세부사항은 전자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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