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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트] 2020년에 비틀스/BTS를 생각하기
    writings 2020. 6. 22. 16:45

    2020년에 비틀스/BTS를 생각하기

     

    곽승찬

     

    비틀스(The Beatles). 비틀스보다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비틀스보다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페퍼상사화이트 앨범보다 컴필레이션 <1>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달콤하기만 한 팝그룹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밴드 단 하나만을 꼽으라면 그게 비틀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반박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록 매니아로 정체화하는 사람들 중에서 본인의 소위 원픽을 비틀스로 꼽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유명 아티스트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선배로 비틀스를 집어넣는 일이 흔한 것은, 어떤 특수성을 뛰어넘은 비틀스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방증하는 현상일 것이다.

     

    단일한 아티스트 이상의 위상을 정립한 만큼, 자칭 타칭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비틀스의 후계로 순간순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비틀스와 가깝게는 짧은 글램록 전성기의 아이콘이 되었던 티렉스(T.Rex)의 마크 볼란(Marc Bolan)이 그랬고, 좀 더 멀게는 갤러거(Gallagher) 형제와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이 새천년의 소리세계를 두고 경쟁하며 잠시간 빛바랬던 소싯적 영국록의 영광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어리고 잘생긴 보이밴드라는 점에서 초창기 비틀스를 연상시키는 원디렉션(OneDirection)이 후계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넥스트 비틀스에 대한 논쟁이 촉발된 것은 2019515일의 일로, 미국을 휩쓸던 BTS가 스티븐 콜베어의 더 레이트 쇼에 출연했을 때였다. 1964, 말 그대로 영국으로부터의 침공수준이었던 비틀스의 방미 당시 그들이 처음 출연한 곳은 에드 설리번 쇼였는데, 전미 40%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신드롬의 신호탄이 되었던 방송이었다. BTS는 바로 그 에드 설리번 극장에서, 완벽하게 비틀스를 연상시키는 흑백화면, 모드 룩, 흡사한 로고가 쓰여진 드럼 세트까지 둔 채 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스티븐 콜베어가 그들을 50년만에 나타난 다음 비틀스로 소개하자, 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일대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Let It Be’‘Yesterday’에 익숙한 채 자라나, BTS의 성장과 성공을 지켜본 세대의 한국인인 나에게, 이 주제는 어쩌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질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넥스트 비틀스라는 레토릭을 넘어서서, 2020년에 비틀스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바야흐로 밀레니얼과 Z세대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온 듯하다. 2018년 장편 데뷔작으로 영화계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킨 김보라 감독은 1981년생이다. 2016년 등단해 퀴어문학을 표방하며 어린 고정독자층을 형성한 박상영 작가는 1988년생이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신진작가 기획전인 젊은 모색에 선정된 아홉 명의 작가는 모두 1981년생에서 1991년생 사이였다. 즉 영화판이나 문단에는 80년대생까지, 화단에서는 90년대생까지로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 새로운 세대의 창작자들이 넥스트 빅 씽'으로 지목받기 시작했다는 흐름만은 명확해 보인다. 창작자들이 어려졌다는 것은 타겟이 되는 향유자들 역시 어려졌음을 뜻할 것이다. 한데, 본격적인 소비사회가 도래한 이후 새로운 세대는 무엇보다 새로운 (장르)음악이라는 문화자본으로 가장 예민하게 대변되어왔다. 대중음악이야말로 다른 어떤 문화영역보다도 즉각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정신을 저격해왔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윙이, 로큰롤이, 싸이키델릭이, 또 레이브가 시대를 지배한 것도, 새로운 음악으로 스스로를 대변하고 싶은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새롭게 대두되는 Z세대를 대변하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로 향하게 된다.

     

    소비자를 찾아내는 일에 민감한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산업을 보면 답은 쉽다. 당장 5월 셋째주 빌보드 Hot 100 차트 상단을 살펴볼까. 2위에 신인 래퍼이자 프로듀서 도자 캣(Doja Cat)이 있다. 피처링은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래퍼 니키 미나즈(Nicki Minaj)가 맡았다. 바로 아랫자리는 사고뭉치 래퍼 식스 나인(6ix9ine)이다. 6, 7, 8, 10위도 모두 래퍼들이며, 그 남은 자리도 알앤비나 소울 기반의 아티스트들이 차지했다. 따지고 보면 1위를 차지한 저스틴 비버와 아리아나 그란데도, 해가 가면 갈수록 블랙뮤직의 흐름과 합치되는 음악을 내놓고 있다. 한국이라고 해서 다를까? 음악 중심 케이블 채널 엠넷은 2012년에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런칭하고 꾸준한 성공을 맛보다가, 2017년에는 고등학교 재학생이라는 제한적인 지원자격을 둔 고등래퍼를 내놓았다. 참가 기준연령을 고작 3년으로 제한해도 충분할 만큼 어린 창작자와 소비자층이 탄탄해졌다는 판단의 발로였을 것이다. 실제로 시리즈는 수많은 90년대 후반~00년대생 래퍼들을 배출하며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 네 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힙합과 소울을 큰 틀에서 아우르는 블랙뮤직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소리가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90년대 초중반생인 나와, 00년대 초반생인 동생이 교실에서 겪은 음악생활의 양상을 비교하면,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차이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중후반에 친구들과 나누던 음악을 돌이켜보면, 그때는 비교적 명확한 구분이 존재했다. 오아시스(Oasis)나 린킨파크(Linkin Park), 뮤즈(Muse) 등 해외 록을 듣는 친구들이 있었고, 다이나믹 듀오, 에픽하이 등 한국 힙합을 듣는 친구들이 있었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등 업템포 댄스 위주로 듣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웬만한 장르음악 매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장르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걸 들을 때는 적어도 다른 걸 듣는다라는 자의식이 모두에게 있었다. 이를테면 인피니트나 샤이니 같은 당대 보이그룹의 댄스뮤직에도 록적인 요소가 포함됐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듣는 우리가 장르의 구분을 흐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후반에 학창시절을 보낸 내 동생의 이야기는 다르다. 오늘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창모, 애쉬 아일랜드, 한요한, 재키와이와 같은 힙합 아티스트들, 혹은 딘, 크러쉬, 박재범, 헤이즈와 같은 알앤비 아티스트들과 보이밴드를 동시에 좋아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은 힙합’, ‘이것은 팝과 같은 식으로 구분을 두지 않는다.

     

    실제 현상이 그렇다. 언더그라운드 출신 래퍼들이 세운 레이블의 소속 래퍼 창모의 곡 ‘METEOR’는 멜론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차트를 지배해온 지드래곤은 오히려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에게 샤라웃을 받는다. 지코 등 아이돌 출신의 래퍼들은 이미 힙합의 중심인물로 인정받은지 오래다. 요컨대, 새로운 세대는 창작자에게나 소비자에게나 장르음악대중음악이라는 구분된 자의식이 없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장르음악'이라는 구분된 자의식도 없다. 이것이 음악을 내용적으로도 지배하기 때문에 앞서 큰 틀에서 아우르는블랙뮤직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새로운 세대가 즐기는 음악에는 장르로서의 힙합, 소울, 알앤비, 전자음악이 흐려져서, 특정 문법을 연상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뒤섞이고 있다. 노래와 랩의 읊조리는 중간쯤으로 느껴지는 싱잉랩, 멈블랩, 클라우드랩이 유행을 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디 소울이나 알앤비 뿐인가. 록이나 전자음악 등 다른 장르음악도 흐릿하게 삼켜진다. 포스트말론(Post Malone)은 록의 발성이나 기타플레이를 싱잉랩에 결합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2019년 빌보드 8위곡 ‘Take What You Want’에는 급기야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이 피쳐링하기도 했다. 물론 힙합과 록의 결합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런 디엠씨(Run-DMC)가 내놓은 것('Walk This Way')이나, 앤스랙스(Anthrax)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와 내놓은 것('Bring The Noise')은 서로 다른 장르의 접면이 느껴지도록 붙인 물리적 결합이었고,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이나 이어받은 림프 비즈킷(Limp Bizkit), 린킨 파크 등의 밴드가 구사한 뉴메탈은 아예 새로운 문법을 갖는 장르로 전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흐려지는 음악들에는 접면도 없고, 새로운 문법도 없다.

     

    오늘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돌아왔지만, 결국 이게 BTS가 놓인 시대의 흐름이다. BTS는 애초 프로듀서 방시혁의 지도로 힙합 보이밴드를 표방하고 육성됐다. 이제는 R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랩몬스터 뿐 아니라, 슈가나 제이홉 역시 래퍼를 꿈꿨다. 출발은 락밴드 컨셉의 아이돌을 만들자’, ‘힙합 컨셉의 아이돌을 만들자와 같은 한 세대 이전의 접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성공을 거둔 BTS에게 힙합을 한다는 자의식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실제로 그들이 내는 곡에는 힙합 비트의 문법이 묻어있기는 하나 장르음악으로 내비쳐지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다. BTS의 슈가는 얼마전 여느 래퍼처럼 믹스테입을 냈고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정작 타이틀곡 대취타는 랩의 물리적 비중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BTS가 평소에 해오던 음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BTS를 듣는 대중들 또한 힙합 그룹’ BTS, ‘전자음악 그룹’ BTS 등의 규정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비틀스는 어땠나? 그들은 스스로가 함부르그에서 맹렬히 공연하던 시절부터 스스로가 로큰롤을 하고 있다는 명확한 자의식이 있었다. 애초에 비틀스라는 이름 이전에 버디 홀리 앤 더 크리켓츠(Buddy Holly and the Crickets)를 추모하는 의미의 ‘Beatals’가 있지 않았던가. 또 비틀스가 마지막 앨범 <Let It Be>를 낼 때의 목적은 초심을 되찾자는 것이었는데, 필 스펙터의 두터운 관현악을 걷어낸, 폴 매카트니가 원래의 의도대로 편곡한 <Let It Be...Naked>를 들어보면, 그 초심이 바로 날 것의 4인조 로큰롤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비명소리에 스스로가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어서저 유명한 셰아 스타디움 공연을 기점으로 라이브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결국 비틀스가 마지막으로 오른 무대는 화려한 조명도 대형 관객도 없는 루프탑 소공연이 아니었던가? <Rubber Soul> 이후 비틀스의 앨범들이 싸이키델릭, 포크, 발라드를 휘저으며 나아갔지만 결국은 한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느껴지는 데에는, 그들 스스로 본인들이 하고 있는 것이 밴드 로큰롤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좀 더 확장해서 고민하면 비교는 더욱 재밌어진다. 실상 비틀스가 오늘까지도 꾸준히 레거시를 유지한 것에는 개별 비틀(beatle)이 해체 이후에도 훌륭한 솔로 프로젝트를 이어갔기 때문인데, 그들이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들이 광의의 로큰롤이라는 장르에 얼마나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레논이 내놓은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의 셀프타이틀 앨범과 뒤이은 솔로 앨범 (<Imagine>)은 비틀즈의 날이 서있는 지점들을 극대화한 명반이었고, 액티비스트 록커의 전형으로 진화를 이끌어냈다. 조지 해리슨은 대표적인 명반 <All Things Must Pass>에서부터 다소 저평가된 후기의 수작 <Brainwashed>에 이르기까지, 60년대 로큰롤이 품었던 싸이키델리아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해냈다. 가장 투명한 것은 링고 스타로, 그가 최근에 내놓는 앨범들(<What’s My Name>, <Give More Love>)을 보면 곡의 스타일에서부터 참여진까지 그가 전형적인 비틀스 스타일의 로큰롤에 얼마나 애정을 느끼는 지를 알 수 있다. 2010<Y Not>에는 폴 매카트니가 함께한 ‘Walk With You’가 실렸는데, 듣자마자 익숙한 종류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폴 매카트니의 경우 윙스(Wings)라는 초대형 밴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정상의 커리어를 이어온 만큼, 몇 번의 외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유스(Youth)와 결성한 듀오 파이어맨(The Fireman)일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 전자음악에 기반한 아방가르드 앨범에서도, 록이라는 뿌리는 사라진 적이 없다. 특히 2007년에 내놓은 간단명료하고 달큰한 로큰롤 앨범 <Memory Almost Full> 이후 2010년대에 그가 내놓고 있는 <New>, <Egypt Station> 등의 앨범에서는 더더욱 로큰롤에 대한 그의 애착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선명한 단면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와 리한나(Rihanna)라는 블랙뮤직의 아이콘들과 함께 내놓은 싱글 ‘FourFiveSeconds’인데, 그는 여기서 스스로를 별로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곡은 카니예도 리한나도 아닌 오롯이 폴이 쓴 것처럼 느껴졌다. 즉 어떤 면에서, 비틀스의 경우 장르음악이라는 자의식이 해체 이후 솔로 프로젝트를 통해서 더욱 선명해진 것이다. , 그들이 완전히 달라 보이면서도, 결론적으로는 비틀즈를 연상시키는 로큰롤을 해나갔기 때문에, 대중들 또한 그들의 성과를 비틀즈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고 호응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BTS로 돌아가보자. 그들이 넥스트 비틀스가 되기 위해서는 단체활동 이후 솔로로도 꾸준한 성과를 내야 한다고 할 때, 음악적인 주축을 이루는 슈가, RM 등의 멤버들의 행보는 어떻게 꾸려져야 할까? 모든 장르가 흐려지는 세상의 스타인 그들이, 어떤 음악을 해야 BTS의 레거시를 관리해, 결국 비틀스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적어도 붐뱁이나 트랩과 같은 힙합 장르음악으로의 회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어지는 장르 붕괴의 흐름을 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해내가야 할까? 그렇다고 하면 BTS라는 브랜드는 레거시로 유지될 수 있을까?

     

    성공의 크기를 놓고 봤을 때 BTS, 혹은 앞으로 등장하는 어떤 보이밴드가 넥스트 비틀스로 불리는 것은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가치평가를 내려놓고 봤을 때, 그들과 비틀스에는 능력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비틀스는 2020년 오늘에도 팝의 역사에 나침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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