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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지 않고 그러하기를(Being, Not Becoming) : 사는 곳으로서의 집, 짓는 곳으로서의 집, 그리고 오늘날의 집 짓기
    writings 2020. 6. 25. 06:26

    ** [건축평단] 2017. 여름호. 

     

     

    되지 않고 그러하기를(Being, Not Becoming) :

    사는 곳으로서의 집, 짓는 곳으로서의 집, 그리고 오늘날의 집 짓기.

     

     

    곽승찬

     

     

    집에서 산다. 병원에서 치료하고, 갤러리에서 유희하고, 학교에서 배우지만, 우리는 늘 집에 산다’. 치료받고 있는 환자를 붙잡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을 붙잡고, 혹은 칠판 보며 공부하는 학생을 붙잡고 어디에 사는지물어보라. 열이면 열 자기 집 위치를 댈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아침 일곱 시에 등교해서 밤 열한 시에 하교하는, 집에서는 잠만 자는 수험생들은 어떤가? 그들은 어디에서 사는가? 물론 우리는 수험생 시절 학교에서 산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게 농담처럼 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사는 곳은 집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고3 수험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많은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낸다. 우리의 보통사람 곽씨의 하루를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다. 눈 비비며 일어나 일터에 나가고, 겨우 퇴근해 저녁 약속을 갖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술을 한잔 걸치면 밤이 한창이다. 그제서야 집이다. 그렇지만 그는 일터나 카페, 혹은 술집 그 어느 곳에서도 살지 않는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어디에 있건, 그곳에 그는 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집 바깥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집 바깥에는 살음이 없다는 뜻일 진대, 집 바깥에서 하는 활동은 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간단한 역설이 있다. 집 바깥의 활동이 삶임을 부정하는 순간 집 안의 활동 또한 삶이 아니게 된다. 집 안에서 하는 활동의 전부를 집 바깥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곽씨가 일반적으로 집에서 하는 일은 먹고, 자고, 쉬는 것인데, 이는 집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실제로도 늘 행해진다. 하루 세 끼 중 두 끼는 밖에서 처리하고, 술집에서 새벽 내 꾸벅꾸벅하며, 바쁜 업무 속에서도 멍 때림의 망중한을 즐기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말이다. 그에 비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집 바깥에서 하는 일들의 상당수는 집 안에서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집 안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는가? 집 안에서 피카소의 원화를 음미할 수 있는가? 집 안에서 토론하고 질문하는 진짜 강의를 들을 수 있는가? 집 안에서 하는 활동은 집 바깥에서 하는 활동 전체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집 바깥에서 하는 활동이 삶이 아니라면 집 안에서 하는 활동도 삶일 수 없다. 살아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면 은 집 안과 바깥에 모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삶이 모든 곳에 있음에도 오직 이라는 특정 공간에만 산다는 표현이 허용된다. 왜일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보통사람 곽씨를 잠시 떠나 보내고 보통은 아닌 하이데거Heidegger를소환하자. 하이데거의 후기 예술사상이 담겨 있는 책 , 언어, 생각Poetry, Language, Thought (1971)에는 국내 학계에 흔히 짓기, 거주하기, 생각하기로 번역되곤 하는 에세이 Building, Dwelling, Thinking이 실려있다. 바로 여기서 하이데거는 ‘Building’‘Dwelling’의 관계를 규명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이제껏 ‘Dwelling’‘Building’에 수단-목적적 도식관계(“means-end schema”)를 대입하는데 그쳤다. ‘Dwelling’‘Building’으로써 이뤄진다고만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Building’‘Dwelling’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Dwelling’은 언제나 모든 ‘Building’주재하는 존재이자 그것들의 끝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Building’‘Dwelling’의 한낱 수단이 아니라, ‘Building’이 곧 ‘Dwelling’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영어 ‘Building’과 독일어 ‘Bauen’의 근원이 되는 고어 ‘Buan’인데, 그 단어는 이웃(Neighbor, “near-dweller”)의 고어인 ‘Nachjfe-bau’에서 볼 수 있듯 ‘Dwell’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본디 ‘Building’‘Dwelling’이며, ‘Building’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Dwelling’하고 있게 된다.

     

    ‘Building’이 곧 ‘Dwelling’이 된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이 관계를 이용해 ‘Dwelling’‘Building’을 재정의하기에 이른다. 먼저 ‘Building’의 고어 ‘Buan’은 현대독일어로 ‘I am’을 뜻하는 ‘Ich bin’, ‘You are’을 뜻하는 ‘Du bist’에도 이어졌는데, 그렇다면 ‘I am’‘You are’은 각각 ‘I dwell’, ‘You dwell’이 된다. 내가 있는 것, 당신이 있는 것, 인간으로 있는 것, 즉 지구 위에 필멸(必滅)의 존재로 사는 것이 바로 ‘Building’이며, 그래서 ‘Dwelling’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하이데거는 고어 ‘Buan’이 원래 물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설(“construction”) 이외에 보호하고 싹트게 하는 경작(“cultivation”)의 의미도 가지는 단어였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Dwelling’으로써의 ‘Building’‘Building’이라는 단어가 원래 가지는 생산행위 외에도 자라는 것들을 농사짓고 가꾸는행위까지 내포한다. 이로써 하이데거의 ‘Dwelling’사는 것’, ‘Building’짓는 것이 된다. 그가 ‘Building’이 곧 ‘Dwelling’이라고 했을 때 그는 짓는 것이 사는 것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어디에나 삶이 있음에도 집에만 사는 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집만이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짓는다는 말에는 완전한 자아의 투영이 전제되어 있다. 그 자아의 투영은 필연적으로 자의(自意) 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글, 가사, 시에는 작자의 자아가 원액처럼 담길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에 의해 지어진 밥과 옷에는 누군가를 배 불리고 싶은, 혹은 누군가를 감싸고 싶은 의도가 담기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죄를 짓는 행위도 그의 자아의 밑바닥이 자의로써 표출된 것이 아닌가? 자아의 자의에 의한 투영. 우리가 망각한지 오래 되었지만, 참된 의미의 지음이란 그런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지음은 본인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자기충족적 행위가 되는 게 맞다. 자신의 완전한 자아를 순수한 자의로 승화시키는 행동을 남을 위해 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음은 본인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옷과 밥, 그리고 집, 즉 의식주에 공통적으로 조응하는 동사가 짓다임을 고려해보자. ‘지음의 자기충족성은 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인 의식주(衣食住)의 자기책임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하이데거의 이론을 다시 환기시키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의식주를 본인의 손으로 완전히 책임지는 사람이 어디 몇이나 되겠는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로 인해 직업과 분업이 잉태했던 저 옛날부터 의식주의 완전한 자급자족은 틀린 일이 되었고, 특히나 주()는 현대에 이르며 더더욱 확고하게 소수 전문인의 손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음식점에 가서 끼니를 때워도 요리법을 대략 알고 있고, 옷 가게에 들러 몸을 감싸도 옷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대강 안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어떻게 지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를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짓는 곳’, ‘사는 곳으로서의 집의 의미를 되찾는 것은 영영 틀린 일이 되 버린 것일까? 오늘날의 집은 내 손으로 지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일본 건축가 후지모리 테루노부(藤森照信)의 작품세계가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동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건축사학자로 먼저 명성을 쌓았고, 200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관 커미셔너로 출품하면서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 원로 건축가이다. 그의 작품이 우리의 논의에서 특별한 이유는 그의 건축이 손으로 지어지기때문이다. 이를테면 2010년 작 소라도부도로부네(空飛泥舟)’를 보자. 일본 나가노현 치노시미술관(茅野市美術館) 앞마당에 설치된 이 공중부양 차실(茶室)에는 그 지역의 시민들과 아이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등껍질을 덮고 있는 동판 껍데기는 어른들이 덮고, 아래를 감싸는 진흙은 아이들이 바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이미 1997년에 니라주택(ニラハウス)’을 지으며 집 주인과 함께 지붕의 구멍들에 부추(니라)를 한 포기씩 같이 심는 진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모두 목재, 동판, 진흙, 식물과 같이 가장 원초적인 재료들을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전문 건설업자의 손길이 전혀 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점점 더 건축에 참여하는 일반인의 범주를 넓히고 있고, 그의 건축답사단 동료들은 조몬(繩文)건축단을 꾸려서 그의 건축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짓기를 시도하고 있다. 집을 진정한 집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소라도부도로부네 (空飛 ぶ 泥舟)

     

    하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후지모리의 방법론은 짓기의 자기충족성이라는 특성에 직접적으로 다가갔지만, 보통의 주택설계에 적용하기에는 아직 현실적인 한계가 많다. 우선 원시적 재료와 공법으로 인해 스타일이 제한된다는 점이 그렇고, 광범위하게 적용하기에는 사람들의 인식에 발맞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가장 보통의 건축주를 상정했을 때, 그는 손에 진흙을 묻혀 직접 쌓아 올리는 오두막보다는 누군가 최신의 기술로 빠르게 지어주는 편리하고 번쩍번쩍한 집을 원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건축가는 어떻게 주택설계를 해야 하는가? 아직도 건축가가 집을, 사람들이 오직 사는 곳으로 부르는 그 집을 설계하겠다면, 그에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다. 집을 설계할 때만큼은 자신이 곧 건축주로 남는 게 그것이다. 짓기의 자아의 자의에 의한 투영이라는 핵심을 온전히 살려내고, 자기충족성까지 지키기 위해선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요컨대 모두가 각자의 집을 짓는 세상이 도래할 수 없다면, 건축가는 자신이 집을 만드는 게 곧 건축주가 집을 만드는 것이게 해야 하며, 그제서야 집은 거주자 자아의 에센스를 그대로 담아내야 하는 공간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건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의식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時代)와 장소(垈地)를 가리지 않고 자화상을 못 박아 걸어놓고 가는 소위 스타건축가의 폭력에 대한 자아성찰은 건축계 내부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논의에 주택을 포함시키는 정도를 원하는 게 아니다. 주택을 설계할 때,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최소한의 편리성을 담보하는데 만족한다. 그 보다 적은 수의 건축가들은 건축주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다. 소수의 건축가들은 건축주와의 인터뷰를 통해 건축주의 성격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리고 정말 적은 수의 건축가들이 건축주가 되어보는수준까지 나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 집이 짓고 사는 곳인 이상, 건축가들은 되어보는수준을 넘어서 건축주이어야한다. ‘되어본다는 말에는 아직 건축가와 건축주의 타자화가 전제되어 있다. 건축가들은 집 짓는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타인이 되는 순간 건축가라는 한 인간의 자아가 개입되고, 그 순간 건축주라는 인간에 대한 오독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오독은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하는 규범적 공간을 불러온다.

     

    병원을, 갤러리를, 학교를 설계한다면, 건축가는 자신의 인생관, 예술관 혹은 교육관이 반영된 프로그램과 동선을 짤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은 다르다. 건축가는 집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자의로 재단할 권리가 없다. 그 순간, 그는 집을 짓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사는 곳으로서의 집’, 그리고 짓는 곳으로서의 집’, 진짜 을 지을 수 있는 오늘의 방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계속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적어도 그래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집이 무엇이 되지 않고 그저 무엇이기를요구한다는 발상은 설계하는 사람뿐 아니라 사는 사람에게도 중요하다. 짓는 것이 자아를 온전히 담아내는 작업이라면, 집은 거주자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은 분류를 거부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연령, 계급과 같은 가장 높은 층위에서부터 직위, 학번, 혹은 보이지 않는 친구관계와 같은 가장 낮은 층위까지의, 인간에 대한 분류. 집 안에서만은 그 모든 분류에 지배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온전히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곳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터에서는 누군가의 상사로, 학교에서는 누군가의 후배로, 백화점에서는 누군가의 구매자로, 우리는 매 순간 분류로 이야기된다. 계급장 이름표 다 떼어낸 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의 집에는 그러한 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의 책임이 있다. 그것이 지켜진다면, 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건축주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아의 일면까지 발견할 것이다. 마침내는 사는 사람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집은 사는 곳이기에, 그래야 하고 그럴 것이다.

     

    주택설계는 건축가의 가장 기본이자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의 기본이나, 피아(彼我)의 벽은 어떤 인간도 넘어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어려운 기본은 또한 건축가의 숙명이기에, 나는 소망한다. 집은 그 무엇이 되지 않고 그리하여 지어지기를. 사람은 그 무엇도 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그것이 집 짓는 자의 유일한 소망이기를. 되지 않고(“not becoming”), 그러하기를(“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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