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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구, 인간형-가구, 인간-가구 : BDSM의 디자인
    writings 2020. 6. 20. 08:16

    ** [잡담] 2018년 봄호.

     

    가구, 인간형-가구,인간-가구 :

    BDSM의 디자인

     

    곽 승 찬

     

     

    (1) 르 코르뷔지에 LC2, Cassina 제작 (사진 le corbusier foundation)
    (2) 미스, barcelona chair, Knoll 제작 (사진 Knoll)

    가구

     

    건축가들은 늘 가구에 관심이 많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옛날옛적에는 통제광 모더니스트들의 사랑을 받았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양식으로 새로운 경관을 창조하려면, 모든 걸 건드려야 했으니까.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같은 '건축가'들은 LC2나 바르셀로나 의자를 만들어 '작품'의 부분으로 집어넣었다. 같은 맥락에서 총체적인 모던-디자이너-인간형을 빚어내려던 바우하우스(Bauhaus)의 비대한 페다고지는,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비교적 공예의 차원에 머무르던 가구디자인을 모던건축의 일부로 인식되게 했다. 당장 원조 바우하우스 최고의 아웃풋이 강철파이프 의자를 만든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아니었던가. 물론 정점 바깥에서도 관심은 꾸준했다. 데 슈틸(De Stijl)의 대표주자 게리 리트펠트(Gerrit Rietveld)는 몬드리안(Mondrian)의 그림을 그대로 의자로 만들었고, 아르누보 천재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는 건물만큼이나 선적인(linear) 의자를 만들었다. 그 이전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그의 친구후배들에게야 더더욱 자연스러운 관심사였다.

     

    이들이 만든 가구는 이름값에 비해 편안하지는 않았다. 아니, 않았다고 한다. 사실 앉아본 적이 없어서 나도 잘 모른다. 상술한 명작들의 초판은 디자인 미술관에나 있을 따름이다(한국에서는 강원도 원주의뮤지엄 산에서 몇을 눈으로 관람할 수 있다). 오리지널 디자인 제품들을 여전히 팔기는 하지만, 카시나(Cassina), 비트라(Vitra), 카르텔(Kartell), 크놀(Knoll), 허먼 밀러(Herman Miller) 같은 브랜드의 고가라인으로 적어도 내 지갑과는 거리가 멀다(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임스(Eames) 라운지 체어를 갖고 있는걸들켜서서민이 아닌 죄’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모더니즘 가구디자인이 완전히 유리장 속에만 있다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는 순혈 브로이어 B34의 두 세대쯤 지난 잡종과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실수로 만든 듯한 곡목가구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또 내 방에는 바르셀로나 의자의 조잡한 짝퉁이 있는데, 미스가 그걸 보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더니즘 가구도 모더니즘 건축처럼, 결국엔 인기상품으로 포섭되는 여느 아방가르드 예술의 운명을 따라간 것이다. 보편성의 꿈을 흉내 내며 조롱하는 보급판들만 남긴 채.

     

    통제에 대한 신념이 빛을 바래자, 가구디자인은 다시 별도의 디자인영역이 되어 건축가들에게서 멀어졌다. 마침내는 가구로 개성을 과시하는 스타디자이너들이 나타났다.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론 아라드(Ron Arad),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마크 뉴슨(Marc Newson) 같은 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유행을 보급했지만 근본적으로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결여하고 있었다.그동안, 건축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가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건축은 물리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인데, 가구야말로 몸이 직접 맞닥뜨리는 물리환경이 아닌가?당장 당신도 건물의 벽이 아니라 의자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 않은가? 라스무센(Rasmussen)과 팔라스마(Juhani Pallasmaa)의 이론, 혹은 홀(Steven Holl)이나 춤토르(Peter Zumthor)의 건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일군의 건축인들은 예민한 휴먼스케일의 경험을 가구디자인에서도 찾고자 했다. 그런 흐름을 타고 세계 건축학과 1학년 수업에는 약속처럼 가구만들기가 포함되었다.

     

     

     

    (3) [시계태엽 오렌지] 속 코로바 밀크 바
    (4) 앨런존스, [Hatstand, Table and Chair (1970)]
    (5) 앨런존스, [Table] 확대

    인간형-가구

     

    거칠게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가구는 멀리서 바라보는 오브제이거나 가까이에서 느끼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낸 가구도 있다. 스탠리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자. 공간들은 하나같이 비일상적이다. 인테리어, 의상, 소품들은 연출된 톤을 숨기지 않으며 폭력과 섹스에 대한 페티시즘을 직접적으로 영상화한다. ‘코로바 밀크 바는 특히 흥미롭다. 그곳은 우유와 함께 마약을 파는 곳인데, 주인공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이 방문하는 타락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바 안의 가구들은 여성의 나체를 그대로 본뜬 형상을 하고 있다. 테이블은 뒤로 손발을 짚은 여성이고, 우유는 무릎 꿇은 여성의 젖꼭지에서 나오는 식이다. 이상체위와 BDSM에 대한 집착의 노골적인 언급이다.

     

    장면에 등장하는 가구들은 영국 팝아티스트 앨런 존스(Allen Jones)의 작품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큐브릭은 애초에 존스에게 직접 영화소품을 디자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보수가 없어 거절당했고, 대신 아이디어를 차용할 것을 허락 받은 것이다. 앨런 존스의 대표작 <Hatstand, Table and Chair (1970)>를보자. 제목은 모자걸이, 테이블, 의자인데, 보이는 건 가죽 코스튬을 착용한 헐벗은 여성 마네킹 셋이다. 그 중 손을 양쪽으로 든 채 서 있는 마네킹이 모자걸이. 펼쳐 든 양팔에 모자를 거는 것이다. ‘의자테이블은 비교적 명확하지만 더 야하다. 의자에 앉으려면 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여성을 깔고 앉는 모양새가 된다. 짓눌린 가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절대 신을 일이 없을 가죽 롱부츠의 다리가 등받이가 된다. ‘테이블은 아예 후배위의 자세를 하고 있다. 마네킹이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거울을 바닥에 부착해 두었다.

     

    작가의 은밀한 취향이 어떤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하지만 통제광 모더니스트, 상업화한 포스트모더니스트, 착한 현상학자들이 마음에 들어 할 모양새는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은 공개된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페미니즘이 일차적인 부흥기를 맞을 때였다. 작품은 즉각적으로 미소지니(misogyny) 인식되었고, 철거를 주장하는 반대시위가 들끓었다. 8 뒤에도 작품들은 악취탄의 공격을 받았고, 다시 8 국제 여성의 날에는 페인트 제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작가 스스로는 당당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부수적인 피해다. 나는 예술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규범을 공격하고 싶었다. 나는 그걸 하기에 완벽한 이미지를 찾았고, 작품이 전투적인 페미니즘의 도래와 동시대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고일 뿐이다.” 많은 예술가들도 작품을 사랑했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엘튼 (Elton John), 군터 작스(Gunter Sachs) 같은 사람들이 작품을 소유했고,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이나 이세이미야케(Issey Miyake) 앨런존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2012년에는 세트에 260 파운드로 낙찰되기까지 했다.

     

     

     

    (6) 제프 고드, Femcar Bound in Gord's Famous Office Chair (사진 House of Gord)
    (7) House Of Gord 홈페이지

     

    인간-가구

     

    앨런 존스의 작품에서 더 극단적인 영감을 받은 듯한 사람이 있다. 스스로를 매드-본디지-과학자로 칭했던, 제프 고드(Jeff Gord). 그는 한발 더 나아가서, 아예 진짜 여성을 가구로 쓰는본디지 작업을 선보였다. ‘인간가구로 번역되는 포르니필리아(Forniphilia)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것도 그다. 원리는 간단하다. 앨런 존스의 작품에서 마네킹이 있을 자리에 실제 여성이 있다. 이를테면 존스에게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작업인<Femcar Bound in Gord's Famous Office Chair>를 보자. 전신 PVC 코스튬으로 결박 당한 모델이 엉덩이를 위로 향한 채 의자에 묶여있다. 말 그대로 인간이 가구가 된 케이스다.그의 웹사이트 ‘House of Gord’에는 이것 외에도 일일이 소개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작업들이 실려 있다. 개중엔 훨씬 가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업들도 많다. “Treadmill(러닝머신)”, “Air Chair(투명의자)”, “Bird Cage(새장)” 등등. 제목만 봐도 불안한 예감이 드는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반드시 뒤에 아무도 없을 때, 웹사이트에 들어가보자.

     

    창의적이라면 창의적인 그의 작업들은, 모두여성의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하고 때로 고통을 주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그는 안전과 상호동의 및 상호쾌락에 관한 엄격한 기준을 준수해야 함을 역설한다. "제가 다른 사람들을 대변할 없지만, 신체결박행위는 성적이며 행위에 참가하는 사람 모두의 쾌락을 위한 거에요. 그게 아니라면 동의하지 않은 파트너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사디스트적 욕망에 그치니까요.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 복종적인 파트를 맡는 여성은 모든 동의 하에 이루어지는 신체결박게임에서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의 요구사항을 무시한다면 그녀를 다시 없어요. (…) 천천히 시작하고, 조심하고, 자신의 가능성과 지식수준 안에서 출발하세요. 신체 결박은 스키나 스카이다이빙처럼 위험할 수 있으니 위험 요소를 만들거나 싸구려 도구를 사용하지 마세요.”*

    (*
    정효봉 씨의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재인용했다. 번역: 이정은)


    물론 묶고, 통제하고, 고통을 주고받는 행위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대표적인 성적 기호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BDSM이 대단히 특수하다고 하기엔 도착증의 목록은 길고도 길다). 하지만 제프 고드의 접근은 신체를 특정 기계/가구의 일부로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소-장르로 인정받을 만하다. ‘포르니필리아는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될 예정이라고 한다.

     

     

     

    섹스를 디자인하기

     

    불편하다. 맞다. 인간형-가구이든, 인간-가구이든,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걸맞지는 않다. 여성을 (1)성적으로 (2)대상화하는 컨텐츠의 재생산이므로, 운동장을 기울이는 데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흠잡을 데 없는 논리다.그런데 상황이 쉽지만은 않다. 페미니즘은 완전한 엄숙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성녀-창녀의 남성중심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의 확산 덕분이다. 열기와 닫기, 그 두 가지 방향성이 양립하는 좁은 땅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이성애자 남성이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성적대상화가 아니기가 힘들다. 여성이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이거나 / 결론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면 흉자’, ‘명자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발화자가 여성이고 페미니즘을 직간접 언급한다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여성과 섹스를 결부시키는 대부분의 표현은PC-리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게 좋지 않은 이유는, 결국 패야하는 건 성적대상화가 아니라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당연하지만) 성평등한 세상이다. 성평등한 세상은 성적인 대상화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성불평등과 성폭력이 없는 세상이다. 구조적인 불평등이 없고, 의사에 반하는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남성-여성, 남성-남성, 여성-여성 어떤 방향/형태의 성적인 대상화가 일어나도 문제 될 게 없다. 마지막 그림을 계속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여성이 사회적, 물리적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현재에 여성이 개방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대상화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들딸로, 대학생으로 대상화되고, 디자인의 과정 속에서도 사용자로서 대상화된다. 모든 예술작품 속 주인공은 대상화를 통해 샘플링된 누군가. 인간사 모든 일은 내가 당신을 바라볼 때 일어난다. 인간의 본질, ‘진짜 내가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은 100년 전에나 유효했던 미신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1) 성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와중에, (2) 대상화 자체를 거부하는 헛발질을 하지 않기에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BDSM을 은/직유하는 디자인의 방법론을 업데이트하는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이 될 수 있다. 디자인을 포함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나와 세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드러내고 조정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관습, 통념, 예절 같은 것들의 경계를 건드리고 확인할 수밖에 없다., 가까운 미래를 현실정치가 만든다면, 예술은 동시대의 인간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는 선에서 먼 미래의 진보를 상상한다. 따라서 섹스를 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성불평등과 PC 시대 예술의 정치적 임무가 된다. 이때, 극도의 대상화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취향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BDSM을 소재로 삼는 것은, 가구(건축)만의 방식으로 성평등에 관한 진보에 기여하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 앨런 존스와 제프 고드를 업데이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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