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진보 못하는 정치, 진보 하는 공간 : 청와대 이전을 거부하며
    writings 2019. 11. 10. 20:14

    노순택, 배후설-메가바이트산성의비밀 001, 2008.

     

    진보 못하는 정치, 진보 하는 공간.
    청와대 이전을 거부하며 

     

    곽승찬

     

    * 2018년 2월 당시의 글입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청와대 이전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촛불시위가 당선시킨 대통령이 <광화문대통령시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

     

    2012년 대선부터의 대표공약이었고, 이번엔 아예 별도의 공약기획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결국엔 취임사의 한 꼭지로 언급되었다.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선캠프 멘토인 모 원로건축가가 나서 당위성을 강조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광화문 광장의 적자임은 드러낼수록 좋을 터이고, 수도 기능 분산에 관한 미완의 과업을 계승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구현방식이야 어찌됐든 정치적 조건들은 달아오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청와대를 ()설계하는 일은 다른 어떤 설계와도 다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행정부 수반의 관저를 설계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비서실, 정책실, 국가안보실 따위의 공간 기능성을 제고하는 일에 그칠 일도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민주주의-적인 디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 또한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이유를 묻는 일이며, 국가의 향방을 묻는 일이고, 인간의 진보를 위하는 일이어야 한다.

     

    물론 진보는 오염된 말이다. 진보는 즉각적으로 보수라는 상대항을 떠올리게 하니까. 그게 틀린 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겐 진보와 보수로 틀을 댄 보이지 않는 액자가 있다. 우리는 그걸 갖고 다니며 여기저기에 들이댄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건 아니지만, 이건 진보적인 정당, 저건 보수적인 정당, 나는 진보적인 사람이니까 여기를, 너는 보수적인 사람이니까 저기를 지지하며, 우리가 믿는 정치가 굴러간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 속의 정치는 늘 액자 속에 있는 거다.

     

    하지만 그게 맞나? 정치는 정말로 양가치의 각축장인가? 오늘의 정치면을 펴보자. 청와대 대변인은 평창동계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조롱하는 야당에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그 대변인은 충남지사에 도전하기 위해 사의를 표명했다. 지금의 충남지사는 여권의 잠룡인데, 그의 당권 도전 여부를 분석하는 기사도 있다. 충남지사가 당내경선에 도전했던 지난 대선에서 각각 지지율 3,4위를 기록한 정치인들은 합당을 위해 손을 잡았다.1)

     

    하나. 평창올림픽에 북한을 초대하는 게 이념의 문제일까? 일견 그렇게 보인다. 정치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우리에게도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니까, 북한을 초대하는 건 친-사회주의적인 행위이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다. 그래서 평양올림픽이라는 워딩을 끌고 와 정부를 비판()한다. 반대쪽은 어떤가? 한민족이 하나되는 모습을 강조한다. 그래서 평화올림픽이라 부른다. 양쪽을 대변한다는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믿는 (것처럼 보이는)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간단하지 않다. 평창(/)논쟁의 핵심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다. 핵을 지렛대 삼아 정권안정을 원하는 북한과, 단순 안보를 넘어 전방위로 엮여 들어간 세계 각국이 있다. 세상은 디즈니 영화가 아니라서 아무도 이유 없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한참 주먹의 크기를 과시했으니 원하는걸 서로 들어볼 차례다. 이제부턴 타이밍과 레버리지의 문제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평창을 모멘텀으로 삼고 북한 정부가 맞은 편에 앉은 이상, 올림픽은 더 이상 끼워주거나 말거나 하는 운동경기가 아니게 된다. ‘더 큰 핵단추운운하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던 트럼프가 대화는 좋은 것이라며 일단 물러선 이유다.2) 물론 평양올림픽이라 조롱하는 야당 정치인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정당은 무릇 정권을 쥐도록 움직이는 법, 사람들을 휘어잡는 건 간단명료한 가치대립이다. 그래서 빨갱이가 등장한다. 정세의 형태를 모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반박할 수도 없으니까, ‘수구도 등장한다. 결국은 하나의 엉킨 실타래가 있지만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두 이념 사이의 선택이 존재하는 척 하는 게 서로 편한 상황인 거다. 그건 정치인이 아닌 우리에게도 그렇다. 액자 하나만 갖고 다니면 어디서든 내 편을 찾을 수 있고 어떤 댓글을 좋아요할지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체 한 거다. 오늘의 정치는 더 이상 이념의 문제, 진보나 보수 같은 가치의 실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합당한다는 두 정당이 어려움을 겪는 게 정말로 신념의 간극 때문일까? 하지만 제3당의 대표는 지난 대선에 출마할 때만 하더라도 호남에 어필하며 진보적인 가치를 더 자주 언급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들 사이의 이념적인 충돌은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보수의 적자를 노린단다. 즉 오늘의 정치는 일종의 전문분야고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 ‘게임이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공공의 가치와 결부되지만, 공공에 기여하는 동시에 철저히 사적인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전문인들의 영역이 된 것이다. 정치전문인들이 따로 있다. ()는 결국 도지사에 도전하고 싶지만, 정부의 탕평인사에 협조할 겸 청와대 대변인을 먼저 수행한다. 그 전에 지역 국회의원도 역임한다. 더 높은 몸값과 더 많은 트로피를 위해 이리저리 이적하는 축구선수들과 다를 게 없다. 그 뉴스들을 좇아가는 우리도, 전문분야의 관전(觀戰)성을 즐긴다는 점에선 축구팬들과 다를 게 없다.

     

    정치의 이합집산에 따른 혐오나 무관심의 합리화로 귀결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전문화된 현대정치는 우리가 믿어왔던 액자 속 정치, 근대의 이념정치와 다른 기능을 수행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 기능이란 현실의 가까운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당장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 당장 오늘 굶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오늘 해결해야 할 경제, 안보, 문화의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들의 해답은 두 가지 길의 한 쪽에 있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이 너무 고도화되어서, 대부분의 문제들엔 단일하고 항구적인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보수적으로 보이는, 또 때로는 진보적으로 보이는 기술들을 계속해서 섞어 써야 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지(politically correct)보다, 정치적으로 가능한지(politically possible)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그렇게 정치는 가치실현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도구로 기능한다. -납작(super-flat) 한 세상3)의 정치다.

     

    다시. 내가 청와대 ()설계를 인간의 진보를 위한 일이라고 부를 때, 그 진보는 우리가 아는 보수의 상대항이 아니다. 평등의 진보, 인권의 진보, 정치적 올바름의 진보, 근대의 진보를 버려라. 우리의 진보는 시대에 맞춰 재정의된 진보이며, 궁극적인 진보다. 궁극적인 진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개개인이 세상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는 상태다. 그 때, 개별 인간은 스스로의 위상, 주변과의 역학관계를 포함한 관계의 거미줄을 통째로 내려다보는 시야를 갖게 된다. 그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본능으로 이해하며, 그 네트워크-시야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인간 의식 수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이며,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를 변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공간을 통해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변화이기도 하다. 세상과 맺는 관계의 기본 단위는 이며, 나와 너 - ‘우리’ - 는 언제나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공간을 만드는 자들은 그 점을 자각하고, 공간을 도구 삼아 너와 내가 맺는 관계성을 드러냄으로써 진보에 기여해야 한다. 전문분야로써의 정치와 구분되는 광의(廣義)의 정치가 있다고 할 때, 공간디자인의 정치적인 책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건축이 아닌, ‘공간디자인의 정치적인 책임이라고 했다. 이유가 있다. ‘공간건축이 지시하는 현실공간뿐 아니라 가상공간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맺는 관계는 점점 더 물리적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가상공간에서의 관계는 현실공간에 대한 보조역할을 뛰어넘어 별도의 자아를 형성하고, 역으로 현실공간에서의 관계를 조정하기도 한다. 아이폰과 페이스북이 그걸 가능케 했으되 블록체인과 같은 신기술은 언젠가 제도마저 개인차원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의 책임이 공간으로 진보를 이뤄내는 것일 때 오늘의 건축가는 가상공간에서의 새로운 관계성까지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어, 공간디자인의 모든 요소가 진보를 향해 달려가, 인간이 궁극적인 진보에 이르렀을 때, 국가, , 예의범절과 같은 인위적인 것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매 순간 본인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인지하는 사람들은 공감으로 보내고 관용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에 더해 현실정치를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의사결정 또한 가상공간에서의 동등한 P2P시스템 속으로 분산편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축가가 모든 목적을 이룬 순간에 정치는 없다. 그러므로 청와대 ()설계는 인간의 진보를 위한 일로 시작되었으나 인간의 진보를 위한 건축의 끝에는 청와대가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청와대는 당분간 없어지면 안 된다. 오히려 그 모습 그대로 두어야 한다. 정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되었는데, 국제정치의 현실은 진보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 16~17년은 세계화의 믿음이 완연히 꺾였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America First’를 외치며 말 그대로 장벽을 쌓는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브렉시트(Brexit)는 유럽연합의 오래된 꿈을 퇴색시켰다. 유럽전역에서 반복되는 테러로 인해 난민수용에 관한 세계시민적인 관점이 의심받고 있다. ‘난민권력을 쥔 터키의 에르도안은 민주주의를 버리고 이슬람 제정일치 국가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은 본인의 사상을 헌법에 박고 후계자까지 정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는 본인이 직접 총을 들고 계엄을 선포하며 독재로 나아가려 한다. 러시아의 푸틴이 제정러시아의 상징을 사용한지는 벌써 오래 되었다. 국가간의 정치, 경제, 군사적 장벽이 두터워지고 있다. 각 국가는 옹벽 속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를 내세워 국가정체성과 국가상징을 강조한다. 파시즘과 독재의 직전단계다. 청와대의 디자인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팔작지붕의 궁궐양식, 돌로 흉내 낸 목조, 일월도(日月圖)나 진연도(進宴圖)4)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실제로한국의 민족성을 잘 보여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의 현실-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정부가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좋은국가상징인지가 아니라, 어떤 게 외교적으로 유효한국가상징인지가 중요하다. 청와대의 과장된 민족성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강대강의 외교논리 속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를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건축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앞의 내용을 되새겨보자. 청와대를 ()설계하는 것만으로는 매우 한정적인 변화만을 가져올 것이다. 청와대는 결국 행정부의 수반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정치의 직업정치인들은 자리라면 삼권(三權)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판검사였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장관이 되며 장관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행정부 전체도 아닌 행정부 수반을 위한 공간을 완전히 다시 설계한다고 해도 정치권력의 지형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행정-사법-입법에 관련된 공간을 모두 동시에 건드리지 않는다면, 청와대를 뜯어 고치는 건 그저 멀쩡한 상징건축을 하나 없애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더더욱, 상징건축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건축가의 책무를 저버렸다고 할지도 모른다.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를 믿는 사람들이 청와대에서 발견하는 문제는 늘 비슷하니까. 대통령이 있는 본관과 참모들이 일하는 여민관의 거리가 너무 멀다. 눈 귀를 틀어막고 붕 떠있는 제왕적 지도자가 된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불필요하게 넓다. 보고와 지시의 과정이 권위적으로 변한다. 위치가 구중궁궐이다. 민중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착한 건축가는 슈페어(A. Speer), 이오판(B. Iofan)의 건축을 떠올릴 것이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은 규모와 대칭과 즉물적 도상을 향한 병적 집착5)이었음을 되새기며, 청와대의 테니스를 쳐도 될6) 거대 집무실부터 지워낼 것이다. 여민관과 본관의 거리를 당기고 위치를 서울 한복판으로 옮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실제 변화를 만들어낼까? 정말 본관과 여민관이 멀어서 어쩔 수 없이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과연 그럴까. 주세페 테라니(G. Terragni)와 주세페 파가노(G. Pagano)의 디자인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서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활동했다. 독일은 히틀러의 건축을 여럿 남겨뒀음에도 불구하고 독재는커녕 강력한 제헌민주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정치이념적인 진보는 오늘에 유효하지 않을뿐더러, 근본적으로 건축에 적용하여 재생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는 정치의 공간을 진보적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이뤄내는 공간을 짓는 것에 있게 된다. 진짜로 건축의 정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고, 건축가가 어떻게 정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에 따라 건축가의 고민은 현실/가상공간의 디자인 기술을 통해 어떻게 너와 나의 관계성을 이해하게 되는공간을 실제로 형성하는가가 된다. 그것은 전국에 위치하며 동시다발적으로 형성/소멸되는 공간일 것이며,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겹쳐 흩뿌려진 공간조각들일 것이다. 가상공간이 가지는 관계의 확장성과 현실공간이 가지는 관계의 직접성을 동시에 활용하되,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떻게 네트워크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의 시스템이 될 것이다. 물론 청와대는 현실정치의 문제 속에 그대로 남아야 하지만, 동시다발적인 공간으로 진보를 이뤄내는 과정 속에서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앞서 말했듯 건축이 진보를 가져온다면 그 끝에서 궁극의 진보는 대통령제 또한 없앨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외교뿐 아니라 일반 정서상으로도 정치권력의 대명사로 쓰인다. 그러므로 언젠가 청와대가 개방되고, 언젠가 청와대가 사라지는 단계에 대한 상상은 타자가 곧 나가 되어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궁극적인 진보에 대한 상상이 될 것이다.

     

    어릴 적에 좋아하던 정기용 건축가의 말이 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 좀 더 어릴 땐 선생의 말마따나 땅과 사람을 들여다보고 찾아내는 인문적인 해법을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바꿔보고자 한다. “문제도 관계성에 있고, 그 해법도 관계와 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있다.” 권위적인 건축이 따로 있지 않다. 건축을 권위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민주주의적인 건축이 따로 있지도 않다. 어떤 형태가 다른 형태보다 더 민주적이지 않고, 어떤 양식이 다른 양식보다 더 민주적이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세상을 진보시키는 건축은 따로 있다. 그 건축은 관계성을 통해 인간을 바꾼다.

                            

    언젠가 광화문대통령이나 청와대같은 말들은 모두 죽어 없어질 테다.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 때에, 그 말들이 주었던 가능성은 모두 진보의 건축으로 실현되어 있을 것이다.

     

     

     

    1) 이 날은 18 2월 초였다.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박수현 전 대변인은 도지사 출마를 포기했다. ‘국민의당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으로 분리/합당했다. 무엇보다 안희정씨는 피감독자 간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정계에서 사실상 퇴출되었다.

    2) 마찬가지로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대화분위기는 확장되어 2018~2019년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세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이 있었다.

    3) 본래 슈퍼플랫은 무라카미 다카시가 제안한 어휘이지만, 여기서는 임근준 선생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의 오늘을 상하고저가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무시간성의 정크스페이스 폐허로 정의한 개념을 차용했다(https://beta.jungle.co.kr/magazine/19).

    4) 진연(進宴)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 (표준국어대사전).

    5) <거대건축이라는 욕망> (데얀 수딕, 2011)에서 발췌했다.

    6) 테니스가 취미로 알려진 이명박 전 대통령의 표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