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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건축비평의 정통성과 박동진의 문제
    writings 2021. 8. 19. 06:46

    한국 건축비평의 정통성과 박동진의 문제

     

    곽승찬

     

     

    건축비평은, 있긴 있는 것 같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건축비평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정념이 담긴 창조물이라면 무엇 하나 비평의 대상으로 삼지 못할 것은 없다만, 건축은 특히나 문학, 미술, 영화, 음악에 이어 곧잘 비평의 갈래로 호출되곤 한다.1) 또 건축대학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프로젝트-베이스의 설계 중심 교육이 이루어짐에도 건축은 무언가 인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 말하자면 기능적인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에 따라 건축계로 배출되는 학생들은 건축의 보이지 않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하고 쓰는 행위, '건축비평'에 다소간의 의무감 어린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상의 등단제도 역할을 맡는 공모상 역시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문학, 미술, 영화 등 일반적으로 예술으로 당연시되는 영역을 제하고는 보기 드물도록 꾸준하게 맥이 이어져 왔다.2) 당연히 스스로를 건축비평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실존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건축비평은 아픈 손가락이다. 흔히 미국에서 유래한 학제 구분을 따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한 단어처럼 묶어 부르지만, 건축역사와 이론이 보장받는 배타적인 영역에 비해 비평이 서 있는 위치는 흐릿하기 그지없다. 건축역사·이론을 연구하는 (주로 대학에 소속된) '학자'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현장에서 이론·비평을 수행하는 비평가의 사정은 다르다. 건축비평가 송종열은 한국 건축비평의 무기력성을 논하는 글을 열며, “철학이니 역사니 하는 이론이나 비평?!!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왔다.”라는 건축인들의 태도로 우리의 건축비평이 놓인 이와 같은 상황을 함축한다.3) 실제로 많은 건축인들은 건축비평이라는 개념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불필요한 부담으로 느끼며 반감을 드러낸다. 건축계의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이 악화하는 오늘에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하는 듯하다. 일례로 2020SNS 상에서 100회 가까이 공유되며 많은 젊은 건축인들의 공감을 얻은 한 게시글은, “유사 인문학이 건축의 전부인 양, 업계와 소비자를 호도하지 말기”, “보이지도 않는 보이드란 무엇인가?” 등의 강한 표현을 써가며, 대신 디테일”, “구조적 실험”, “배근”, “내진 설계”, “직원 월급등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4) 오늘의 한국에서 건축의 무형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 일’, 건축비평이란 건축계의 방 안의 코끼리요, 건축역사·이론·비평계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인터넷 시대의 오랜 격언을 떠올리자. 어쩌면 건축비평이 최고조의 악플에 시달리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건축비평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되물을 적기일 수 있다. 전술한 글5)에서 송종열은 건축비평이 위기를 자초한 첫 번째 원인을 주관적 취미판단으로 꼽으며,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논박의 부재를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비평의 기율(discipline)을 가져본 적이 없는 (구미와 대비되는) 우리의 상황을 지적하고 싶다. 기율이란, 스탠포드 앤더슨(Stanford Anderson)의 말을 빌리건대, “시간에 따라 자라나되, 시공간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건축에 특유한 지식의 집합체(a collective body of knowledge that is unique to architecture and, though it grows over time, is not limited in time and space)”이다.6) 과연 우리의 건축비평은 내재적인 지식의 집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몸통(“body”)을 형성할 만한 흐름을 가졌는가? 비평이 서 있는 땅이 의심받는다면, 그것은 비평에 존중할 수밖에 없는기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마따나 기율이란 시간에 의해 자라나는 것으로, 과거로부터 쌓아 만들어야 한다.

     

    물론 한국의 건축비평에도 기 추적된 과거는 있다. 초기의 사례로 서울대학교 목구회는 1975목구회 평론집을 출간했으며, 주요 동인이었던 김원 역시 같은 해에 우리시대의 거울이라는 한국 최초의 개인 건축평론집을 출간했다. 김봉렬(1990)은 공간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영무를 함께 언급하며, 김원과 조영무라는 두 명의 비평가가 등장한 1970년대 중반을 한국 건축비평의 시작점으로 설정한다.7) 그러나 이러한 과거는 비평의 기율에 충분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주지하듯 근대 건축비평의 기율이 성립된 기반, 오늘까지 이어진 건축비평의 모델은 모더니즘 건축의 비판적 합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지어진 건물을 평가하고 보완하며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 근대건축의 성숙기를 대략 1930년대 중후반으로 볼 수 있음을 상기해보라.8) 근대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한국인 건축가가 등장해, 모더니즘 건축을 일정 수준 좇아가는 결과물9)을 내놓은 시점에서 물경 40년이 지나는 동안 근대건축의 현장을 실무와 함께 쌍끌이하는 비평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본질적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비평 기율의 정당성이라는 것은 건축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김봉렬은 1970년대를 건축비평의 시작으로 본 기준을 제시해두었다. 그에게 건축비평가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자다: 첫째, 스스로 건축비평가라고 정체화하고 타인도 건축비평가라고 인정하는 자, 둘째, 기관지나 정보전달지가 아닌 전문매체에 비평을 기고한 자. 30~60년대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건축비평가라 할 만한 인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더 명확하게는 1966년 창간된 空間이전에 기관지가 아닌 전문매체가 없었으니, 우리 건축비평은 70년대 중반에 시작된 것이 맞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준은 이미 건축비평이라는 독립 분야가 건축계 내에서 충분히 공유, 이해되는 현대적인 상황을 전제하며, 오늘의 기준으로 어제를 들여다본 결과다. 이미 형성이 완료된 건축비평의 외형에서 얻어낸 조건으로 거꾸로 과거를 재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최초의 건축비평가를 얻어낼 수 없다. 특히나 일제에 의한 근대건축교육을 통해 대목(大木)과 구분되는 건축가의 정체성을 학습할 수 있었던 실무분야와 달리, 비평가는 교육기관을 통해 육성되지 않았으므로 더욱이 그렇다. 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분야를 수행하는 이가 어떻게 자타공인 직업인으로 인정받았겠느냐는 말이다. 김봉렬은 비평가의 기준을 제시했지만, (비평이라는 범주가 없어서) 비평가로 정체화되지 못했더라도 비평의 기능을 수행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 질문 이전에 답해야 할 것은 우선 우리 근대건축의 형성기에 건축을 글로써 논한 인물이 존재했는가이다.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동진(1899-1981)이다. 주지하듯 그는 박길룡(1898-1943)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건축가로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이는 정규 건축교육을 받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두 인물이 가장 주목할 만한 행보를 밟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박동진에 관한 몇 안 되는 기존 연구와 저술은 모두 그의 실무 건축가로서의 성장과 결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박동진에 관한 논의의 기준점이 되는 안창모의 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1997)역시, 사회적 박동진의 건축가로서의 삶을 조망하고 작품분석을 시도한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박동진은 일제와 근대를 거치며, 각종 매체에 기고한 자신의 글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거의 근대화 내지 주택개혁의 문제를 논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대 지식인 건축가의 설계 활동에 오늘날보다 더 큰 현실적인 제약이 작용했음을 고려하면, 건축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가 건물이나 도면보다 더 순수하게 드러난 곳은 지면이었을 수도 있다. 저술활동에서의 문제의식과 달리 그의 알려진 건축작품이 대부분 -현실적인 이유로- 교육 및 종교시설에 한정되기에 더욱이 그러한 사정을 추측해볼 수 있다.

     

    30~40년대에 걸친 박동진의 저술활동을 고려할 때, 그를 실무 건축가인 동시에 건축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 건축계의 논자(論者) 내지는 저술가였다고 규정하는 일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를 1세대 건축가를 넘어, 1세대 건축비평가로 부르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그 스스로야 건축비평가를 자임하지 않았겠다만, 그의 저술이 비평의 기능을 수행한 흔적을 이제서라도 확인한다면 우리 건축비평의 잃어버린 40년을 다시 쓰는 정당한 원점에 그를 놓을 수 있을 것이며, 비평의 기율을 추적 형성해갈 첫걸음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우리가 박동진을 초기 건축가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일본으로 필터링 된) 구미의 근대적 관념에 따른 건축교육을 받고, 역시나 구미 근대건축에 근접한 방식으로 건축설계를 하였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건축비평 역시 구미의 근대적 발명품이다. 박동진의 저술활동을 초기 건축비평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구미 초기 건축비평가들과의 평행 대조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서구권에서도 건축비평의 시작점을 정확히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완전히 합의된 기준은 없다. 미국 건축비평에서 중추적인 위상을 갖는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전업 건축비평가를 기준으로 볼 때,10) 풀 타임(full-time) 건축비평가 직책을 처음으로 부여받은 것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를 비평적으로 뒷받침한 아다 루이스 헉스터블(Ada Louise Huxtable, 1921-2013)으로, 그녀가 취임한 것은 1968년이었다. 전술했듯 1970년대에 이르면 한국에서도 김원, 조영무 등 큰 이견 없이 건축비평가로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서구에는 아다 루이스 헉스터블 이전에도 건축비평가의 계보를 이어온 인물들이 존재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근대건축비평은 근대건축의 배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등장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한국의 근대건축을 직접 형성해가며 글을 썼던 박동진과 직접 대조해야 할 것은 오히려 그들일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들을 몇 꼽아볼까. 이를테면 몽고메리 스카일러(Montgomery Schuyler, 1843-1914)는 박동진보다 한 세대 이전의 인물이나, 흔히 미국의 첫 본격 건축비평가로 이해된다. 그는 전방위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로, 24년간 뉴욕 타임즈의 (건축비평가가 아닌)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건축 외에도 미술, 문학 등에 대해 썼다. 또 러셀 스터지스(Russell Sturgis, 1836-1909) 역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는데, 박동진과 마찬가지로 실무 건축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는 사전이나 역사서를 집필하기도 한 전방위 저술가였지만 초기 건축비평가로 이해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그는 건축가로 유명하지만 잘 알려졌듯 1921년의 허공에 말했다, 1931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등의 비평서로 현대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서구 역사가와 미술비평가의 계보 속에서 근대적 건축비평가의 발생 시점을 특정해내는 일은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11) 다만 앞서 언급한 인물들을 보면, 서구 초기 건축비평가들 역시 박동진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나 역사가, 저널리스트 등 다른 직업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서구 건축비평이 형성된 초기에는 (이전부터 인정받던 미술비평가, 문학비평가 등의 존재로 인해) “비평가(critic)”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긴 했으나, 여전히 건축비평가만을 직업으로 삼는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제1의 정체성이었던 인물조차 찾기 어려웠다. 이 점에서 실무건축가를 건축비평가로 부르기 저어하는 오늘의 사정과는 달리, 실무 건축가를 겸한 박동진 역시 초기 비평가로 이해될 전제가 충족된다.

     

    이를 전제로, 물리적인 측면에서 비교를 이어가보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저술의 규모와 지면의 성격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19세기~20세기 초의 인물들로, 박동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저작목록 총체가 완전하게 파악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구에서 건축비평가로 인정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박동진보다 더 많은 양의 글을 생산했다. 이를테면 몽고메리 스카일러는 뉴욕 타임즈의 오랜 필진이었음에도,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투고했던 에세이의 선집만으로도 (아마도 생전의 유일한12)) 단행본인 American Architecture Studies(1892)를 출간할 수 있었다. 러셀 스터지스는 How to Judge Architecture(1903)라는, 각 시대별 건축을 감상하는 방법을 담은 본격적인 단행본을 냈다. 박동진의 경우 곡선과 건축미(1931), 우리 주택에 대하야(1931), 조선주택개혁론(1941) 등을 썼지만, 비평 성격을 띤 글의 양은 서구 초기 건축비평가들에 턱없이 모자라다. 우리가 박동진이 남긴 저작의 총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하나, 안창모의 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1997)는 근대건축에 대한 이해가 드러나는 박동진의 글을 앞서 언급한 3편으로 한정 짓고 있다. 따라서 전시하 주택과 연료문제(1943)등 광의의 건축 비평으로 볼 수 있는 글을 포함하더라도 서구 초기 건축비평가들에 비해 편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평가를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는 시대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당대 한국에서는 건축에 관한 비평적인 글을 실을만한 지면 자체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비평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중산층 식자계급 독자층과 그들에게 소구할 매체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건축을 먹고 살기 위한공간 이상의 무언가로 논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나눌 먹고 살 만한계층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6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건축 전문매체 空間은 건축 매체를 넘어, 교양을 갖춘 중산층의 도래를 알리며 종합문화지로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김봉렬(1990)의 주장처럼 꼭 전문매체가 있었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확인했듯 서구 초기 건축비평가들도 전문매체보다는 일간지나 주간지 등 종합매체에의 기고가 많았기 때문이다(미국 비평가뿐 아니라, 아돌프 로스가 비엔나에서 머물며 고정 기고한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Neue Freie Presse)역시 종합지 성격이었다).13) 그러나 박동진이 글을 남긴 한국의 1930-40년대 일제강점기는,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세기 말 구미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나마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일제의 문화통치가 시행되며 (박동진의 곡선과 건축미가 실린) 신동아,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朝光), 흥사단 중심의 동광(東光)등이 간행되었으나, 건축비평이 충분히 할당받을 만큼 지면이 다양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1940년대로 들어서면 조선문화말살정책이 시작되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 시기 박동진의 조선주택개혁론이 실렸던 춘추(春秋)가 단 8호까지 간행됐음에도 유일한 민족 문화지로 기록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14) 박동진이 한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나름 적지 않은 양의 글을 남긴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박동진의 글이 내용적으로도 건축비평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느냐일 것이다. 기준이 되는 서구 초기 근대건축비평의 가장 큰 내용적 특징은 동시대 건축을 아이디어의 각축장으로 보고, 특정 건축 사조 혹은 스타일에 대한 지지와 거부를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모더니즘 비평 방법론 등장 이전의 (안목에 의거한 권위를 누린) 감정가들과 그들을 분리시키는 지점이기도 했다. 일례로 몽고메리 스카일러는 여러 편의 글을 통해 마천루(skyscraper)를 옹호한 것으로 유명했다. 주지하듯 마천루는 근대건축사에서 단순히 높은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 승강기와 철골구조와를 결합한 기술적인 성취였을 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진보적인 건축양식으로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그 마천루의 진보성을 앞장서서 옹호했던 이가 바로 몽고메리 스카일러였던 것이다. 한편 아돌프 로스는 (그의 특유한 건축이론을 무어라 명명할 수는 없지만) 기능주의, 반장식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것에 합치되지 않는 여러 경향들을 폭넓게 비판했다. 그 비판 대상은 아르누보, 빈 분리파, 독일공작연맹 등을 가리지 않았다. 또 흥미롭게도 로스는 장식과 범죄등의 에세이에서 미국을 옹호하는데,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다름 아닌 시카고의 합리주의적 마천루들이었다. 아이디어의 각축과 교환이 된 근대 건축비평이 어떻게 대서양을 넘나들며 작동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동진이 주요 저작을 남긴 30년대 한국 건축의 지형을 보면, 1920년대 말부터 경성부청과 경성제대 교사 등에서 모더니즘 경향이 시작되며 양식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이다가, 1930년대에는 그러한 경향이 성숙해지며 미도파 백화점 등이 등장하고 있었다. 또 윤인석(1991)에 따르면, 조선과 건축(朝鮮建築)에는 1925년부터 1931년에 걸쳐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글이 여러 편 실리기도 했다. 오토 바그너, 발터 그로피우스, 한스 푈치히 등이 소개됐고, 설리반과 라이트의 기능주의(1928)라는 제목으로 기능주의에 입각한 건축이 높게 평가되기도 했으며, 꼬르뷔지에씨의 건축에 대하여(1929)라는 글에서는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의 5원칙이 기술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모스크바의 현대건축(1929)라는 제목으로 당대 러시아 건축가 단체들을 다룬 논문을 번역해 수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체의 특성상, 또 당시 건축계의 상황상 이 모든 글은 일본인이 쓴 것이었다. 더군다나 (역시 매체의 특성 탓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글은 서구 건축을 단편적으로, 또 일차원적으로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다. 서구 건축 전반을 스스로 정리해내려는 시도보다는 개별 건축가들을 각기 소개하는 글이 주를 이뤘다. 내용적으로 가치판단이 포함된 경우도 글이 소개하는 대상을 높게 평가하는 정도였는데, 애초에 선진 사례를 소개하는 의도였으니 이를 특정 건축적 아이디어에 자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비평가적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당시를 요약하면, 동시대 서양 근대건축을 빠르게 배워 좇아가고 있다는 것을 글과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생산주체는 대부분 식민지 지배조직과 식민지 본국 건축인들인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조선과 건축에 실린 일본인 건축가들의 글은, 근대건축비평의 내용적인 필요조건이 되는 비평적 가치판단을 판단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면 박동진은 어땠나? 박동진은 특히 동아일보에 연재한 우리 주택에 대하야3,4,5장에 걸쳐 서구 근대건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우선 이는 한국인 건축가가 남긴, 서구 근대건축에 대한 유일한 논고다. 일제시기에 박동진 외에 글을 남긴 건축인으로는 박길룡과 김윤기가 있는데, 안창모(1997)에 따르면 김윤기의 유일한 글은 동아일보에 연재된 유일한 휴양처 안락의 홈은 어떠하게 세울까(1930)로 주택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또 박길룡은 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1930) 등 박동진과 비견할만한 양의 글을 남겼으나, 역시 근대건축의 사상을 논한 적은 없다.

     

    그러면 그 내용을 들여다볼까. 박동진은 현대건축의 추세라는 소제목 아래에 건축에 새로운 사조가 밀어들기 시작한 것은 실로 19세기 말의 위대한 유산이다라는 표현으로 운을 떼며 근대건축을 아이디어의 각축장으로 보는 동시대적 이해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후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고 일어난 아르누보 운동첫째, “빈에서 일어난 세세숀 운동둘째로 꼽는다. 새 시대에 맞게 직접 건축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시도하고 창조적 예술의 형식을 찾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박동진은 아르누보와 빈 분리파를 모두 높게 평가한다. 이어 그는 아르누보를 자연의 형태성을 탐구한 것, 분리파를 자연미 그대로의 형식적 응용을 거부하고 비모사적 표현으로 발달해나간 것으로 간명하게 구분한다.

     

    물론 빈 분리파의 다종다양한 작업을 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이런 평가에 반례를 들어 반박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의 우리는 아르누보와 세제션이라는 이분법으로 19세기말의 근대건축운동을 포괄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연-비자연이라는 간명한 구도 설정은, 다소간의 엄밀성을 희생시키더라도 평자의 단일한 세계관으로 시대를 설명해 아이디어의 파워게임에 고지를 점하려 드는 근대 서구 건축비평의 전개방식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박동진은 본인이 제시한 두 서구 건축의 극점을 소개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아르누보가 고대의 주제이든 기하학적 형태를 배척하는 점에서 청신한 생명을 획득하였으나, “오래 계속치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곡선적 표현의 자유가 그 자신 결국 로코코식의 방일과 번잡에 떨어져 자연물 그대로의 모방에 그만 그 진로가 막힌 까닭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분리파 건축의 우위를 주장하며, 그것이 직선과 기하학적 구성에 특색을보였으며, 그리하여 세세숀 이후의 각 방면으로 그 생명이 흐르게되었다고 역사적 승리까지 주장한다.

     

    근대건축의 아이디어들에 대한 간명한 구분과 가치판단은 계속 이어지는데, 일례로 그는 독일 표현주의 건축을 자극적, 광폭적 자기주관에만 집착하는 결과로 구조, 재료를 무시하여 건축으로서의 근본을 망각하였으므로 그만 이제는 제도할 수가 없게되어 세력이 쇠락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도 그는 반대항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제주의 건축이다. 그는 독일을 다루는 목차에서는 국제주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를 보충하듯 프랑스로 넘어가 르 코르뷔지에에 상대적으로 긴 지면을 할애한다. 여기서 구성이 돋보인다. 그의 글은 일견 무작위로 국가를 나열한 뒤 각국의 건축운동을 요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의 비평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19세기말의 흐름을 정리하며 기하학/인위성의 우위로 전제를 설정한 뒤, 같은 원리로 이후 독일에서 발생한 국제주의의 승리를 강조하고, 그 결과로 이어지는 주인공으로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를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더 극단적인 합리성을 주창한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을 미래로 향하는 지점에 놓는, ‘서사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박동진의 엄밀성이 구미의 근대 건축비평가들에 뒤지는 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아돌프 로스는 장식과 범죄를 통해 똑같이 아르누보를 비판하면서도 콜로만 로저(Koloman Moser)의 특정 가구 작품15)을 언급하고,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같은 건축가 뿐 아니라 오토 에크만(Otto Eckmann) 등의 판화가도 비판하는 등 폭넓은 이해도를 선보인다. 그러나 박동진을 우리의 1세대 건축비평가로 판단하기 위한 기준점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닌 비평적인 태도의 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박동진이 자신이 비평적으로 고평가한 건축적 아이디어들을 바탕으로 당대 한국 건축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시도하지 않은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러나 1930년대에 조선 건축계를 이끈 것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변건축가들이었음을 기억하자. 식민지 지배조직의 건축에 대한 평가를, 더군다나 본인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에 꺼내놓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또 짚고 가야 할 것은 주택개량론의 문제다. 물론 박길룡이나 김윤기가 남긴 주거 환경에 대한 비판도 건축인에 의한, 건축을 다룬 논의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건축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가치판단하는 비평의 영역이기보다, 그야말로 급박한 기능적인 요구로 논의됐던 큰 틀의 주택개량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로 주택개량 논의는 이전의 개화파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이미 김옥균의 치도약론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신문이 공히 위생의 문제를 문명의 척도로 제시한 바 있었다.16) 박길룡이나 김윤기가 주택의 문제를 논하던 시점에도, 건축계 바깥의 많은 지식인들이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주택개량 논의는 근대건축에 대한 이해도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건축비평 행위의 등장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동진이라는 인물은, 박길룡 등과 함께 1세대 근대건축가로 인정받음에도, 그 중요도에 걸맞게 연구되지 못했던 경향이 있다. 물론 실무건축가로서 박동진이 덜 논의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 논고를 통해 고찰한바, 박동진은 그의 저술 활동을 통해서 우리 근대건축사 상에 특유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다름 아닌 그의 글에서 우리 건축비평이 싹을 틔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오늘 우리의 건축비평이 서 있는 흔들리는 땅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율을 추적 형성해야 한다. 박동진의 글을 우리의 첫 건축비평으로 기억하고 다시 읽는 일은 그 첫 걸음이 될 지도 모른다. **

     

     

     

     

    각주

     

    1) 가까운 예로, 2020년 비평계의 초심자를 대상으로 열린 강연 프로그램 아고라: 서교 크리틱스는 문학, 시각, 음악, 영화, 연극/무용 등과 함께 건축을 한 꼭지로 내세웠다.

     

    2) 꾸밈 건축평론상, 공간 건축평론신인상에 이어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이 11회째 운영되고 있고, 2020년까지 출간된 건축평단역시 학생건축비평상을 운영했다. 꾸밈, 공간, 와이드AR 공모 수상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건축평론동우회도 존재한다.

     

    3) 송종열, 한국 건축비평의 무기력성: 현실진단과 과제, 꽃과 칼: 건축 아르고스, 서울하우스, 2018, pp.67-80

     

    4) https://www.facebook.com/yangjae.yi/posts/10156952477886174

     

    5) 각주 3의 글.

     

    6) Stanford Anderson, The Profession and Discipline of Architecture: Practice and Education, In A. Piotrowsky and W. Robinson eds., The Discipline of Architectur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1, pp.292-305.

     

    7) 김봉렬, 한국 건축 비평계의 흐름 비평가와 기록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지, 345, 19909, pp.7-10.

     

    8) 곽희정, 1926-1945년 사이 한국근대건축의 모더니즘적 경향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1996.

     

    9) 박길룡의 화신백화점(1937), 박동진의 조선일보 사옥(1937) 등을 꼽을 수 있겠다.

     

    10) 아다 루이스 헉스터블 이후 뉴욕 타임즈 전업 비평가의 계보는 스카이 라인(Sky Line)”으로 유명한 폴 골드버거(Paul Goldberger, 1950-)에 이어 허버트 무샴(Herbert Muschamp, 1947-2007), 니콜라이 우루소프(Nicolai Ouroussoff, 1962-), 마이클 킴멜먼(Michael Kimmelman, 1958-)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각종 신생 매체와 SNS의 파급력에 힘입어 지면의 권위와 비평가의 영향력이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게 되었다(일례로 주목받는 젊은 비평가 알렉산드라 랭(Alexandra Lange)은 건축/도시 블로그 커브드(Curbed)의 필진이다). 그러나 마이클 킴멜먼이 쓰는 뉴욕 타임즈 건축 비평은 여전히 주목을 받으며 적잖은 갑론을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11) 서구 근대미술비평은 대략 아비 바르부르크(1866-1929)의 도상해석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하니, 근대 건축비평과 커다란 시간차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미술비평은 더 빠르게 내적인 논리를 갖추고 본격적인 분과로 자리 잡았다.

     

    12) 이 부분은 추가적인 사실확인이 필요하겠다. 다만 이 책에 수록된 글을 포함한, 몽고메리 스카일러의 더 폭넓은 선집인 American Architecture and Other Writings는 두권으로 나누어 사후에 출간됐다.

     

    13) 물론, 미국의 Architectural Record등 건축 전문 매체에의 기고도 있었다.

     

    14) 유일한 비() 친일 선전성 매체였다는 뜻이다.

     

    15) 아돌프 로스가 비판한 '마법에 걸린 공주(the enchanted princesses)' 옷장은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의 작품을 뜻한다. 모저는 1868년생으로 빈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분리파 디자이너였다. 신화적인 모티프와 겉면 금 부조 장식, 내부 공주 머릿결의 유려한 표현, 하부 옷장다리의 과장된 장식성에서 전형적인 아르누보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가구다.

     

    16) 박진희, 일제 시대 주택 개량론에 내포된 근대성, 한국주거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제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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