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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의를 당기는 기표의 텐션: 《나를 닮은 사람》 리뷰
    writings 2022. 10. 3. 22:56

    《나를 닮은 사람 (The Other Self)》 (권오상, 최하늘)

    2022.8.23.-10.2.

    일민미술관 1전시실 및 로비

     

     

     

    기의를 당기는 기표의 텐션: 《나를 닮은 사람》 리뷰

     

    곽승찬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시의 기의라고 한다면, 전시의 물리적 구현은 전시의 기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권오상(b.1974), 최하늘(b.1991)의 2인전 《나를 닮은 사람》은 물리적 구현 측면에서의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통해, ‘조각의 귀환’이라는 붕 뜬 기의에 추동을 불어넣는 기표의 텐션을 보여준다.

     

     전시가 열리는 일민미술관 1전시실[1]은, 시의적절한 전시들을 기획해온 기관의 중요도를 고려하면 새삼 소박한 공간이다. 들어서는 즉시 한눈에 전체가 들어오는 이 직육면체의 공간은, 바닥면적 자체도 소규모 독립전시공간 수준일뿐더러, 시각적인 결절점이 될만한 건축적인 요소도 없다.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 하나인 점, 층고가 대략 3.5미터로 미술관으로서는 높지 않은 점도 이 공간의 조건적인 단순함에 기여한다. 물론 여기에는 구 동아일보사 사옥이라는 중요도 높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를 대수선하면서 적극적인 건축적 개입을 하기에 어려웠던 사정이 있을 것이다.[2] 이렇듯 전시실의 물리적 조건을 읊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고 복잡해질 수도 없는 공간의 내재적 한계가 2인전이라는 조건과 맞물려 결국 전시의 공간적 긴장감을 유도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보통의 규모를 갖춘 현대미술관에서 2인전을 연다고 가정해보자. 구분된 공간에 두 작가를 각각 배치하고, 보조공간에 아카이브와 대담 영상 등을 두는 것이 안전한 선택일 것이다.[3] 그러나 전시가 열린 일민미술관 1전시실에서 그러한 접근은 거의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모종의 구획이 가능할 만큼 면적이 충분하지도 않고, 선적인 동선을 부여하자니 평면에 강한 종적 방향성도 없거니와 진압·퇴장 동선을 분리할 방도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눈에 펼쳐지는 《나를 닮은 사람》의 풍경은 언뜻 난관을 해소하지 못하고 작가 2인의 작업을 무작위하게 산개해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뜯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시는 흩뿌려진 두 작가의 작업 사이사이에 수많은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텐션의 우주를 부여함으로써 돌파구를 모색한다. 가장 확실한 세부전략은 권오상과 최하늘 각각에게 상대방의 기존 작업을 지지체로 삼은 신작을 제작케 한 것이다. 이를테면 전시장 입구 바로 오른편에 ‘직립한’ 권오상의 〈세 망령들-주름들(The Three Shades-Wrinkles)〉(2022)는 스핑크스 고양이의 주름으로 기하학적 형상의 표면을 교란하는데, 그 전시장 대각선 정반대에는 정확히 같은 크기의 최하늘의 지지체 <낡은(Old?)>(2022)가 무거운 척하는 껍데기를 두르고 ‘누웠다’. 이 전시장 대각선 방향의 인력을 직교하는 또 다른 텐션은 최하늘의 <나란히(Rank)>(2022) 두 점이 형성한다. 이 두 작업은 입구에서 더 먼 쪽의 <나란히>와 나란히 놓인 권오상의 <흉상(Bust(WA))>(2022)을 3D스캐닝 한 뒤 다시 3D프린팅한 결과물이다. 관계가 역전되어 최하늘의 지지체 역할을 하는 권오상의 <흉상>은, 가상의 기암괴석을 상상해낸 뒤, 다시 그 (가짜) 자연재료를 처음 맞닥뜨린 전통의 표리일치 조각가를 스스로 연기하며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우디 앨런의 형상을 연상하고, 연상해낸 껍데기를 억지로 덧씌운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는 조각의 물질과 표면과 재현의 문제에 대한 작가 기존의 실험을 변주하는 것이다. 최하늘의 <나란히>는 입구 근처에서는 공업적인 회색의 가짜 기암괴석을 미끈하게 제작해내며 권오상의 작업에 숨은 알리바이를 지적하는 듯하더니, 지지체가 되는 <흉상>의 바로 옆에서는 3D프린트라는 매체 특유의 얇은 적층 구조를 드러내도록 잘린 입을 벌리고 있다. <세 망령들-주름들>이 그랬듯, 상대 지지체 작업의 문제의식에 자신의 태도로 화답한 것이다.

     

     쌍방 화답의 대각선이 전시장 평면을 크게 양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와중에, 미시적인 텐션들이 또 다른 전략으로 가지를 치며 전시장 전체에 별자리들을 그려낸다. 지배적인 인력은 미술사적 언급이다. 앞서서 권오상의 지지체가 됐던 최하늘의 <낡은>은 –쉽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지만- 전시장의 일부인 것처럼 장난스럽게 벽에 붙어서 ‘실제로’ 무거운 비관습적 재료를 택했던 미니멀리즘의 장소성을 언급한다. 그런데 바로 왼쪽으로 계단 몇 칸 아래에 놓인 권오상의 구작 <헬멧-레드불(Helmet-Red Bull)>(2011)은 기념비 두상 조각인 듯 높은 좌대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좌대 자체가 벽기둥이라도 되는 양 벽에 붙어 있다. 심지어 이 현대의 영웅 기념비 두상 -2022년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F1 레이싱 팀의 헬멧- 은 얼굴 쪽이 벽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거꾸로 놓여 있다.

     

     좌대에 관한 미술사적 언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시장 이곳저곳에서 팽팽한 러닝 개그(running gag)를 만들어낸다. 권오상의 <흉상>과 최하늘의 <나란히>는 특이하게 회색의 좌대 위에 올려져 있는데, 이는 최하늘의 <나란히>와 일체감을 이루며 좌대를 제작물의 일부로 삼키려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또 전시장의 우측 가장 안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최하늘의 <조연 1(Supporting role 1)>(2022) 두 점과 권오상의 <세 망령들-괴석(The Three Shades-goeseok)>(2022)을 보자. <조연 1>에서는 좌대 그 자체가 「트론(Tron)」(1982)를 연상시키는 산업적인 디자인 오브제로 변신 합체하며 조연이 아닌 주연의 지위를 차지하려 드는 한편, <세 망령들-괴석>에서는 (가짜) 대리석 좌대 그 자체가 돌연변이 진화하며 역시 홀로서기에 나선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한편 이 세 개의 기둥 집합은 <세 망령들-주름들>이 <세 망령들-고양이 좌대(Thee Three Shades-Cat’s pedestal)>(2022) 및 최하늘 <버젓이(Go to open)>(2022)와 이루는 세 기둥 집합과 함께 전시장 오른쪽 벽면의 끝과 끝에서 수미쌍관을 형성한다. 우선 여기서의 <버젓이>는 권오상의 <세 주름들-괴석>의 형상을 좇은 듯하면서도 권오상의 그 ‘무거운 척하는’ 표리부동 가벼운 조각을 ‘무거운 것처럼 생긴’ 표리일치의 가벼운 조각으로 대체한다. 한편 <세 망령들-고양이 좌대>는 최하늘의 <낡은>을 다시 한번 변주해 (<조연 1>의 형상을 좇은 듯한) 괴이한 좌대로 변신시켜 놓은 뒤, 다시 스핑크스 고양이의 뒤틀린 두상을 올려두었다.

     

     물론, 최하늘의 <조연 1>은 또 전시장 왼쪽 구석에 놓인 <주인공(Booger)>(2022)와 다시 조각의 위치를 언급하며 전시장의 안쪽 벽 끝과 끝을 잇는다. 스티로폼의 표면을 그대로 살려서 또 한 번 (‘무거운 척’하는 것이 아닌) ‘무거운 것처럼 생긴’ 조각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제 아예 좌대에서 거꾸로 떨어진 천정에 붙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공조기의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흔들리며 스스로의 가벼움을 증명하고 있다. 초월적인 좌대에서 탈출해 전시장이라는 실제 장소의 조건에 밀착하는 조각사의 흐름을, 동시대적 표면성의 문제를 덧씌워 아예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농담은 다시 <주인공>의 전시장 입구 쪽 반대방향에 놓인 <새 이름(Always Reboot: Ghost)>(2022(재출력))으로 이어지며 전시장이라는 현실의 장소에서까지 도망쳐버리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전시장의 각 지점에 미시적인 힘을 부과하는 미술사적 언급이라는 인력의 존재를 가장 쉽게 증명하는 것은 권오상의 작품 제목들일 것이다. <세 망령들> 연작은 오귀스트 로댕(Auguste-René Rodin)의 <세 망령들(The Three Shades)>(1886?)에서 그 제목을 따왔고,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Three Piece Reclining Figure)>(2022)은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Three Piece Reclining Figure)>, 특히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 드레이핑된 1975(Three Piece Reclining Figure: Draped 1975)>에서 형상까지 따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권오상의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을 통해 드러나는 또 하나의 작은 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권오상은 헨리 무어 작업의 형상에 최하늘의 실제 사진을 욱여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최하늘의 얼굴은 그 앞에 놓인 <Y의 흉상(Bust)>(2016-2018)과 이어지며 작가의 사적 관계를 연결망으로 삼게 된다. 게다가 <Y의 흉상>은 권오상의 대학 시절 초기 사진조각 작업 <140장으로 구성된 증명의 강요 (A Demand of Composed of 140 Pieces)>(1998)와 20년을 뛰어 넘어 꼭 닮은 모습으로 마주 보고 있으니, 미술의 역사로 촘촘히 당겨놓은 전시장 한복판을 작가들 개인의 서사가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한번 서문을 읽는다. “조각은 기념비로서 재현의 의무와 형식에서 해방된 이래 사실주의 미학과 미니멀리즘의 흐름 속에 보수적으로 이원화되었다. 한국의 경우 90년대 중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개념적 설치미술의 부상을 이끌었고, 주제지향적인 국제 이벤트가 성행하며 탈장르화, 비물질화의 경향이 조각의 존재론적 입지를 약화시켰다. (...) 《나를 닮은 사람》은 이처럼 조각의 근원을 의심하고 해체하기를 갈망한 동시대 미술의 토대 위에서, 역설적으로 조각의 정체성을 재고하는 권오상과 최하늘의 2인전이다.”[4] 그런데 이 서문이 구태여 혹은 의도적으로 지적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근 몇 년 사이 기정사실화한 ‘조각의 귀환’이다. 이 전시는 조각의 지위를 대체했던 담론적 장소성의 다매체 설치미술이, 국제 비엔날레와 함께 갱신의 동력을 잃어버린 공백 속에 놓여 있다. 실상 조각의 해체에 대한 갈망이 아닌, 조각이라는 (광의의) 자율적 영역의 귀환이 갖는 의미에 대한 긴박한 물음, 그것이 (잇따르는 여러 조각 전시들과 함께) 이 전시가 갖는 기의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닮은 사람》은 전시공간의 물리적인 한계와 2인전의 형식을 창조적으로 승화해내어, 작품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텐션의 네트워크를 엮어냈다. 이는 전시장을 안팎을 채운 모호한 기의를 이리저리 당겨내는 기표의 방법론이 됐다. **

     

     

     

    [1] 정확히 같은 기간 동안 오민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가 일민미술관의 2전시실과 3전시실을 차지했다.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매체에서의 동시대적 조건을 탐문한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

    [2] 그런 점에서, 전시실 안쪽의 바닥 단차 역시 공간 구분을 위한 현대적인 선택이기보다는 기존 건물의 물리적 조건에 기인할 것이라 추측된다. 그로 인해 초래되는 불필요한 동선 장애와 애초에 낮은 층고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3] 가까운 예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의 연례 2인전 《타이틀 매치》도 이 같은 구성을 취했다.

    [4] 『《나를 닮은 사람》 전시 리플렛』, 일민미술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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