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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자가 의자이기 위해서 : 지금 여기의 관점
    writings 2024. 2. 17. 15:06



    비톨트 립친스키,

    <의자의 역사> (Now I Sit Me Down : From Klismos to Plastic Chair, A Natural History)

    (마르코폴로, 2024. 3월 출간예정)


     

     

    옮긴이의 말

    의자가 의자이기 위해서 : 

    지금 여기의 관점

     

      동시대 한국 건축의 관찰자로서, 지난 10여년간 체감한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소위 디자이너(가 있는) 가구에 관한 관심의 증대였다. 돌이켜보면, 2010년대 초중반 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할 때에만 해도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알아도 LC2나 바르셀로나 체어를 언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디자이너의 이름이 알려진 명작 의자를 떠나, 의자를 의식적인 관심의 대상 자체로 삼는 일 자체가 적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서양근대건축사 수업은 예술공예운동을 건축 모더니즘의 원점 중 하나로 가르쳤고, 더 스테일을 배울 때면 백이면 백 레드 블루 체어를 맞닥뜨렸다. 많은 학교의 저학년 디자인 커리큘럼에는 (바우하우스 페다고지의 흔적 중 하나인) 의자 만들기도 포함되었다. 그러니 최소한 ‘건축’이 지금의 ‘건축’이 된 이후로는, 의자가 건축가의 업역으로 포섭되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했다. 그러나 관념적인 건축사의 세계가 아닌 한국의 ‘지금, 여기’에서 의자는 족보 없는 존재들, 의식에서 사라지는 기능적 도구일 뿐이었다. 일상의 우리는 유통망을 갖춘 대형 종합 인테리어 브랜드의 평준화된 의자들과 ‘듀오백’으로 퉁쳐 불렀던 사무용 의자 사이를 오갔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인스타그램과 판데믹의 시기를 지나오며 상황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드센추리 모던’, “바우하우스 감성”은 어느덧 지겨운 (그리고 다소 정체불명의) 유행어로 자리잡았고, (주로 20세기) 가구의 디자이너, 제조사, 판본에 대해서 해설해주는 SNS 콘텐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됐다. 비트라, 놀, 카시나, 카르텔, 허먼 밀러, 프리츠 한센, 칼 한센 앤 선, 아르텍 같은 제조사의 오리지널 라이센스 가구들이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각종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 대량 입점되며 손에 닿는 거리로 다가왔다. 해외에서 중고 디자이너 가구를 매입해서 재판매하는 ‘빈티지 가구’ 유통업자는 -종종 순환사용(circularity)에 관한 사회적 아젠다로 무장하고- 한 ‘업계’를 이룰만큼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위 ‘족보 있는’, 더 와닿게는 ‘비싸고 예쁘고 잘 만든’ 가구의 세계가 존재하며, 우리가 써왔던 일상의 의자들은 수차례 열화되어 못나진 파생품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상응하듯 ‘오리지널’을 취급하는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 상세 설명’ 페이지는 으레 착석감과 편안함 이상의 비중으로 디자이너의 이름과 명성을 기술하게 됐다.
      원본 아이콘의 접근성이 높아지자, 열화판 저가 의자들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게 됐다. 그러므로 더 그럴듯하게 베끼기가 쉬운 플라스틱 의자들이 먼저 타겟이 됐다. (8장에 등장하는) 임스 부부의 플라스틱 셸 모델들은 100만원 짜리 비트라, 허먼 밀러 버전과 (어쨌든 모니터 상으로는 좌판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3만원짜리 복제품이 같은 가구 중개 웹사이트에 공존한다. 역사적인 가치에서는 DSW, DAW와 격차가 있으나, 필립 스탁의 고스트 체어나 지안카를로 피레티의 플리아 체어도 같은 이유로 비슷한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뉴트로”한 아이콘이더라도, 원본과의 동일성을 충분히 유지하면서 열화하기가 어렵다면 레플리카도 시들하다. 이를테면 비톨트 립친스키가 통찰해냈듯 임스 의자가 진정한 산업 생산품인 것에 비해 브로이어의 의자는 대체로 공예품에 가까웠고, MR10 역시 우아한 단순성과는 달리 산업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는데, 한국의 열화복제품 시장이 그 차이를 예상치 못하게 방증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세스카 체어의 경우 그나마 그 이름을 달고 있는 경우도 좌판이나 팔걸이가 오리지널과는 거리가 멀고, MR10처럼 강관 캔틸레버를 굳이 반호로 구부리는 저가품은 더더욱 드물다. 이 두 의자는, 저자가 지적하듯, 모던 클래식 제품군 중 오리지널도 여전히 충분히 저가화되지 못한 축에 속한다. (11장에서 서술되는) 현대의 사무용 작업 의자의 경우 핵심이 성능에 있으니 외형의 복제가 무의미하지만, 어느 회사가 에어론, 휴먼스케일을 쓴다더라 하는 소식이 흔한 직장인의 가십거리가 되며 역시 근래에 훨씬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휴먼스케일이 바로 디프리언트와의 협업 제품을 내놓은 밥 킹의 회사이며, 프리덤 체어와 월드 체어가 여전히 이 회사의 대표 제품군이다.) 이 모든 것이 싫은 소비자들은, 역으로 이케아로 대표되는 적당히 기능하는 무명의 가구를 택할 것이다.
      고가 오리지널 뿐 아니라 열화품들이 디자이너 이름을 남발하는 현상은, 의류 명품 브랜드가 대중에게 알려지며 명품 브랜드 “st” 가품이 쏟아졌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쿠튀르 패션과 달리 서구 모더니즘 건축/가구 디자이너들의 과녁은 대체로 중간다리 없이 대중을 향했다. 미하엘 토넷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라면, 인더스트리얼한 바우하우스에서든 워크맨십의 손끝을 드러내는 대니시 모던에서든, 대량생산이 가능한 ‘소비자 의자(‘konsumsthul’)’라는 지향점은 미감과 어프로치에 선행했다. 그렇다면 베끼기 쉬운 복제품이 이기는 온라인 가구 쇼핑몰의 풍경은, 모더니즘의 상상된 미래 속에서 어떤 디자이너가 진짜로 산업화된 생산공정과 일치된 작가적 디자인을 내놓는 데에 성공했는지를 판가름하는 뒤늦은 채점의 장으로 봐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면죄부이자 역사적인 운행일까? 만듦새를 뭉개고 대충의 생김새를 택한 DSW, DAW, 위시본 체어, 카페 체어 열화본의 범람을, 모던 디자이너가 꿈꾸던 대중화의 결말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면 모던 가구(의 생김새)에 대한 이 관심이 -대니시 모던의 ‘산업화된 장인정신’까지는 못 가더라도- 모던이 꿈꿨던 좋은 품질의 일상용품에 대한 추구로 이어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역사적 정당성은 언제나 결과로서의 제품 이면의 방법론과 이상에 의해 부여되는 법, 생산방식이 곧 외양이 되는 대량 생산 의자라는 이상은 삼차원 성형 플라스틱 셸을 갱신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이어질 수 있을까? ‘모던’을 벗어나면 더 많은 질문이 기다린다. 디자이너와 아이콘을 구매하겠다는 갈망은 어느 순간 종지부를 찍고, 클리스모스, 카브리올, 치펜데일, 18세기 파테유, 윈저와 같은 (아이콘과 영향관계를 주고받는) 비-아이콘 스탠다드 의자에 대한 관심과 독해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즉 족보 있는 가구가 ‘있다’는 추상적인 욕망은 족보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 질문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무명의 스탠다드야말로 오히려, 블루스 음악에서 그렇듯, 외형을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유의미한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이 모든 질문들에 희망적으로 대답하기 어렵다면, 지금 벌어지는 현상들은 결국 소비자로서의 대중, 그리고 소비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서의 의자에 관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의자가 문화로서 무대에 오르는 곳, 전시장을 통해 제시되고 수용되어 온 근래의 흐름을 살피면, 의자와 그 역사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도에 소비시장의 원본 의식에 상응하는 진전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명백히 깨닫게 된다.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2012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렸던 <핀 율 탄생 100주년 전>으로, 가구 전시로서는 이례적일만큼 커다란 흥행을 거두었던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여전히 의자의 실물을 전시장에서 맞닥뜨리는 일에는 부연이 필요해 보였다. “이번 전시는 가구가 단순한 소비 아이템이 아닌 오랫동안 우리 삶의 공간을 채워갈 아름다운 예술품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기획”되었다는 것이 전시 서문의 포부였는데, 이러한 정당성의 희구는 핀 율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 <핀 율> 흥행의 1년 뒤, 한솔뮤지엄이 개관했을 때는 복도 한 켠에 대표적인 20세기 디자이너 의자 아홉 점이 제시되기도 했다(뮤지엄 산으로 이름이 바뀐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관객 대다수에게는 왜 의자들이 전시되고 있는지 자체가 생경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규모는 작아도, 우리 세대에게는 모니터로만 보던 중요한 의자들의 실물을 국내에서 상설전으로 만날 수 있는 퍽 소중한 기회였으나, 의자에 역사와 이름, 원형이 되는 판본이 있다는 관념은 널리 받아들여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역사적인 의자들의 판본과 한국 현실의 의자까지를 아우르는 <생활디자인전 I : 갖고 싶은 의자>가 열렸던 것이 이미 2004년이었으며, 이어 200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의 공동주최로 (9장에서 소개되는) 비트라 콜렉션 “명작 100선”의 실물 전부를 전시하는 <위대한 의자, 20세기의 디자인: 100 Years, 100 Chairs>전이 열린 바 있다. 즉 2000년대 중반에 이미 역사적 이해도의 근간을 마련하려는 공적인 기획들이 한국에서도 시도됐던 것이다. 그러니 북유럽 인테리어 트렌드와 기관 특유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힘입은 <핀율> 전의 흥행에는, 10년간 벌어진 역사의식의 답보 혹은 퇴보에 눈 감고 양적인 성공에만 축배를 들기에는 불길한 뒷맛이 있었다. 
      다시 10년이 지난 오늘, 그때 그 불길함의 예정된 파국을 확인한다. <핀 율> 전의 의자가 전시장에서 빛을 발하는 (비교적 순진하고 전통적인) 객체적 문화자본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의자가 가진 소비력의 증명 능력이 전시라는 틀 자체를 와해하고 있다. 물론, 특히 20세기 중반까지의 것으로 한정짓는다면 교과서적인 의자를 넘어 다양한 역사적인 작업을 실견할 기회는 잦아졌다. 그러나 그 기회가 의자의 역사(관)에 영향을 끼치려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기획/제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성행하는 것은 빈티지 가구 수입업체의 팝업 쇼룸과 다름 없는 전시들이다. 이를테면 2022년 DDP에서 열린 <우리를 매혹시킨 20세기 디자인>은, 중고 가구 수입 판매/대여 업체들이 전시장 구역을 나눠 각자의 콜렉션을 자랑하는 합동 쇼룸으로, 전시라기보다는 물건을 살 수 없는 기이한 가구 페어에 가까웠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프리츠 한센 150주년 전시>는 기획이 가미되어 그보다 세련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전시라는 시스템을 더 자연스럽게 유용하는, (역시 물건을 못 사는) 브랜드 쇼룸이라는 점에서는 더 나쁘기도 했다. 프리츠 한센은 국내 디자인 가구 시장의 성장을 타고 2020년에 한국 지사를 냈고 이후로 공격적인 브랜딩 작업을 이어왔는데, 이 전시 역시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또 9장에서 인용되는 한스 웨그너의 회고에 등장하듯, 프리츠 한센은 애초부터 한스 웨그너나 폴 케홀름과 같은 가구 디자이너의 작업을 생산하는 대형 가구 제작자였다. 이를테면 삼성전자가 신시장에 진출하며 삼성 전자제품과 그 콜라보 작업물을 선뵈는 행사를, 유의미한 디자인 전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무형문화재와 젊은 디자이너에게 커미션 워크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서 거대한 광고로서의 전시를 공동주최할 필요가 있었을까?) 
      전시 기간이 연장되는 흥행을 거둔 <프리츠 한센> 전은, 자연히 동시대 대니시 모던 운동을 이룬 주요한 플레이어였던 핀 율의 11년 전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2012년에 벌어진 일이 전시를 간접적으로 도구화해 미술관을 보유한 기업을 브랜딩한 것이었다면, 2023년에 벌어진 일은 아예 관객을 잠재적 소비자로 상정하고 전시라는 매체 그 자체를 고급 브랜딩의 현장으로 와해한 것이었다(어찌 되었든 핀율 전은 탄탄한 콜렉션에 기반한 기획력 있는 작가전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의자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의자라는 소비만 남은 지금 여기의 상황을 가장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의자 ‘전시’는, 빈티지 가구 유통업체에서 주최하는 페어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20세기 오브제들이 맥락 없이 뒤섞이는 가운데, 파는 이에게도 사는 이에게도 맥락을 붙잡을 의지는 없고, 상상 소비의 인스타그램용 촬영만이 가득하다. 가구판 미니 프리즈 서울이라 불러야 할 듯 인파가 붐비지만, 프리즈나 아트 바젤이 아무리 성공한들 장터를 시장이라는 힘에 대한 인정 이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스운 일이다. 10년간의 양적 팽창이 대중의 수용방식에 끼친 영향력의 끝이 이것이라면, 앞선 질문들에 어떻게 희망찬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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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디자인사나 의자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수는 많지 않지만 한국에도 의자에 관한 좋은 글을 썼거나 쓰고 있는 필자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그들의 글에 이번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책에 어떠한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역자의 전문성이 부족한 탓이다. 아는 것이 부족해도 용감하게 이 책의 번역에 뛰어든 이유는 소비만 있고 역사는 없거나, 소비에만 역사의 죽은 파편이 있는 지금 여기 의자의 사정에 문제의식을 느껴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천재 디자이너와 그들의 창조해낸 명작의 이름들로 의자의 역사를 단선화하지 않는다. 나는 의자의 역사가 그런 식으로 쓰여지고 받아들여진 것이, 역사가 소비로 증발해버린 까닭 중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그와 달리 저자는 의자를 표현과 기능, 예술과 공예, 생산과 소비, 기술과 재료, 구조와 장식, 사회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집단관습과 개별신체가 겯고트는 작지만 특정적인 장으로 인식하기를 시도한다. 그 고유한 장의 중심에는 의자라는 사물 뿐만 아니라 앉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이 있다. 이 책의 영문 원제가 (‘의자’라는 제재를 피하는) “Now I Sit Me Down”이며, 부제는 (어떤 아이콘 의자들이 아닌) “From Klismos to Plastic Chair”이고, 또 다른 부제가 (정전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하는) “A Natural History”인 것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건축이나 디자인 역사서의 정립된 연대기적 구조를 따르지 않고, 의자라는 담론의 고유한 접면들을 일단 만져보듯 필요한 터치들을 겹쳐놓는다. 각 챕터가 다루는 핵심문제와 전환, 시대사조, 주요인물, 역사적 유형은 서술의 층위가 불연속적이지만 궁극적으로 한가지 목적을 향한다. 의자를 다른 무엇도 아닌 의자로 정립하는 일이다. 의자를 의자이게 한다는 것은 의자를 그것만의 고유한 문제와 그에 따른 맥락을 갖는 역사적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레 클린트의 경구처럼 “모든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중 몇은 이전에 해결된 적이 있”으니까.   
      의자를 텅 빈 소비력의 표식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는 의자를 의자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그러기 위해서는 의자에 걸맞은 역사를 쓰고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 결여된 지점이다. 따라서 옮긴이의 말으로 빌린 이 지면에서는 직접적인 해설을 덧붙이는 대신 오늘 한국에서 의자가 처한 상황을 썼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하지 못한 동시대 한국 의자계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바로 독립 의자 디자이너들의 등장이다. 이 글이 다루는 같은 시기, 시장의 팽창에 따라 자기 작업을 하는 젊은 독립 의자 디자이너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유례 없는 저성장 속에서 어린 건축가들이 맡는 프로젝트가 소규모 상업공간의 인테리어 작업으로 축소되는 사회경제적 현상도, 그들과 협업할 가구 디자이너들의 등장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감각적 작업들을 쏟아내는 이들 디자이너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 개인적으로도 지금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대구 기반 디자이너의 너도밤나무로 된 보조의자를 포함해, 몇 점의 의자를 세간에 들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남은 숙제는 어려서 할 수 있는 감 좋은 작업을 뛰어넘어, 의자의 고유한 속성과 맥락을 갱신하는 작업으로 의자의 역사에 기여하는 일이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앞으로의 작업세계를 통해 의자를 의자이게 하는 시대적 과제에 몫을 다할 수 있을까? 나도 지켜보며 말과 글로 보태고자 한다.

    2024년 2월
    곽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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